대 그레고리오 1세 성인은 부유한 원로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펠릭스 3세 성인과 아가피투스 1세 성인으로 이미 두 명의 교황을 배출한 유서 깊은 귀족이었습니다.
그레고리오 성인은 법학 등 고등교육을 받고 573년 로마 시장이 되었습니다. 이듬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로마 첼리오 언덕에 있는 부모의 저택을 성 안드레아 수도원으로 만들고, 그곳에 입회해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레고리오는 시칠리아에 있는 가족 소유 토지에도 5개의 수도원을 더 세웠습니다. 578년 베네딕토 1세 교황에게 부제품을 받고, 1년 뒤 펠라기우스 2세 교황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교황 대사로 파견됐습니다. 로마로 돌아와서는 다시 성 안드레아 수도원에서 수도생활을 하며 펠라기우스 2세 교황을 도와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펠라기우스 2세 교황이 선종하자 그레고리오는 수도자로서는 처음으로 만장일치로 제64대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전염병이 로마를 휩쓸던 시기, 그는 출중한 행정 능력과 깊은 신앙심으로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그레고리오는 교회 법령을 정비하고 무능한 성직자들을 해임하며 사제와 주교들의 영적 쇄신을 강조, 막대한 경비를 들여 기아와 전염병으로 시달리는 시민들을 구호하기 위한 자선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지혜롭게 교황청 재산을 관리했고, 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 포로들을 석방시키며 부당한 박해를 받던 유다인들을 보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레고리오는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중세 주교와 사제에게 교과서와도 같았던 「사목 지침서」, 「욥의 윤리」 등 각종 성경 해설집과 설교집, 당시의 신학 · 전례 · 역사 · 사회학과 관련한 800여 통의 서한을 모은 「서간집」, 「그레고리우스 전례서」 등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그는 교회의 성가를 재조정하고 그레고리오 성가도 제정하여 ‘그레고리안 성가’의 편집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게르만족뿐만 아니라 영국 앵글로색슨족의 개종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수도원장으로 재임할 때, 로마 시내에 영국에서 온 포로들이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보고는 그들에 대한 연민을 품게 된 게 발단이었습니다. 교황이 된 후 그레고리오는 성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인 아우구스티노 성인과 40여 명의 수도자를 영국의 켄트 왕국에 파견했고, 요크 대교구와 캔터베리 대교구, 그리고 12개의 소속 교구를 설정했습니다.
그레고리오는 교황권이 교회의 최고 권위임을 재확립하는 동시에, 교황을 일컫는 칭호인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함으로써 교황권이 지배가 아닌 봉사하는 특권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한 베네딕도 수도회를 면속해 교황의 권위 아래 두었습니다.
그레고리오는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대교황’이란 명칭으로도 불립니다. 그는 604년 3월 12일 로마에서 선종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사후 즉시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음악가, 가수, 학생, 교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는 그레고리오는 교회 미술에서 귓가에 비둘기가 자주 그려진 채 등장하는데, 이는 그가 방대한 저작 활동을 할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그의 귓전에 머무르며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