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니모 성인은 12살 때 로마에 가 도나투스라는 유명한 학자에게 수사학과 라틴어 문학을 배웠습니다. 주일에는 사도들과 여러 순교자의 성지, 특히 카타콤바를 방문하며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리베리오 교황에게서 세례를 받고, 프랑스를 여행하던 19살의 예로니모는 트리어에 정착해 정부 관리로 일하다 수도생활에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는 370년쯤 고향인 아퀼레이아로 돌아가 발레리아누스 주교의 지도를 받으며 같은 뜻을 가진 몇몇 동료와 함께 공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373년 예루살렘을 순례한 뒤에는 안티오키아에 머물면서 성서 주석 방법과 그리스어를 공부했는데, 이때 그리스도의 환시를 보기도 했습니다. 이후 예로니모는 칼치스 사막에서 2년간 은수생활을 하며 어느 랍비에게 히브리어를 새로 배웠습니다. 그러나 은수자들 사이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 아리우스주의로 대립이 일어나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로니모는 379년 안티오키아에 다시 갔을 때 일정한 사목을 맡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바울리누스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예로니모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인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 성인의 강의를 듣고 오리게네스의 성경 주석 방법에 매료됐습니다. 이에 그리스어로 돼 있던 오리게네스의 수많은 저서를 라틴어로 번역했습니다.
성 다마수스 1세 교황은 예로니모를 비서로 임명해 신·구약 성경 모두를 라틴어로 새로 번역하는 대업을 맡겼습니다. 당시 서방 교회에서는 이미 여러 개의 라틴어 성경이 있었지만, 교황의 요구는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로니모는 마르첼라 성녀와 바울라 성녀 등 상류층의 미망인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수도생활에 대한 열정을 고취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로니모에게 신임이 두터웠던 교황이 선종하자 일부 적대자들은 그가 여자들의 집을 들어갔다 나오는 모습을 보고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예로니모는 로마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로 가 바울라 성녀와 그의 둘째 딸인 에우스토키움 성녀 등과 함께 이집트로 갔다가, 386년 여름부터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본격적으로 수도생활에 임했습니다. 귀족 부인이었던 바울라는 자신의 돈으로 세 개의 남자 수도원과 한 개의 여자 수도원을 세울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바울라는 여자 수도원 원장을, 예로니모는 남자 수도원 원장을 맡았습니다.
이후 예로니모는 베들레헴 수도원에서 34년 동안 성경 번역 활동에 몰두하면서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 부인과 사제의 독신 및 성인 유해 공경 반대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명확한 근거를 갖고 반박했습니다.
그럼에도 예로니모의 가장 큰 업적은 391년부터 406년까지 계속된 성경의 라틴어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구약성경의 경우, 히브리어 원문을 토대로 라틴어로 번역하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70인역 성경」을 배척하는 유다인 랍비들과 토론을 벌이며 새롭게 번역했습니다. 나중에 라틴어 성경에 대중적이라는 뜻의 「불가타」라는 이름이 붙여진 건 원문에 매우 충실하고 정확한 번역일 뿐만 아니라 대중이 쉽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는 트렌토 공의회에서 이를 공식적인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
예로니모는 서방 교회 4대 교부 중 한 명으로, 신학교의 수호성인 또는 수덕생활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