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뽈(바오로), 넌 이 신학교에서 자유롭단다. 그런데 너에게 하나의 의무가 있으니, 바로 자유로울 의무야.”
필자가 프랑스 유학 시절 신학원 영성지도 신부님께서 첫 영성 면담 때 하신 말씀이다. 자유로울 의무. 이 역설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길은 결코 남이 대신해줄 수 없고, 스스로 걸어야 하는 길이다. 그렇기에 자유로워야 한다. 자유롭지 못하면 결코 응답할 수 없다. 그러나 자유는 양성되어야 한다. 뿌려진 씨에 물과 거름을 주고 정성스레 가꾸어야 하는 것처럼, 자유 역시 정성스럽게 가꾸고 돌보고 보살펴야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자유로운 신학원 생활이 처음엔 좋았지만, 갈수록 고통스러웠다. 주어진 자유가 너무 편했지만 동시에 생소하기도 했다. 힘들었던 것은, 그 자유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는 점이다. 살면 살수록 자유를 사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 신학교에서 쌓아올린 나의 삶은 조금씩 무너지고 생활은 피폐해져 갔다.
그러던 중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엄습했으며, 내가 왜 이곳에 와 있는지, 그리고 길 위에서 어디쯤 와있는지 스스로 묻게 되었고, 특히 부모님을 비롯한 고국에 계신 소중한 분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신자분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방탕’한 생활을 뒤로하고 영성지도 신부님과 함께 나의 일상을 새롭게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아주 조금씩 다시 일어설 수 있었으며, 영성지도 신부님은 인내심을 갖고 동반해 주셨다. 그 과정에서 내가 가려고 하는 사제의 길을 내가 정말로 바라는지 묻게 되었으며, 나를 향한 주님의 음성 곧 “나와 같이 이 길을 갈 수 있겠니?” 하신 말씀을 분명히 들을 수 있었고, “예, 주님!”하고 답할 수 있었다.
영성지도 신부님께서는 이 과정을 자전거를 타는 것에 비유하셨다. 처음에는 미숙해서 넘어지기도 하고 다칠 위험도 있기에 보조 바퀴가 필요하지만, 어느 순간 바퀴가 없어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신부님의 역할은 내가 스스로 자전거를 탈 수 있도록 보조 바퀴가 되는 것이고, 내가 스스로 갈 수 있을 때에는 보조 바퀴처럼 사라지는 것이라고 하셨다.
거기서 경험한 하느님의 교육학은 ‘자유의 교육학’이었다. 곧 자유를 양성하는 것이다. 자유는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양성된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동반하는 것이 초점이다. 그것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기에,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은 다반사이며, 그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스스로 일어설 수 있고 계속해서 스스로 앞으로 가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 경험이 사제 성소만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해당한다고 확신한다. 모든 사람이 거룩하게 살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보편적 부르심에서 사제도 수도자도 평신도도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자녀라는 동등한 이름으로 거룩한 삶으로 초대된 것이다. 그 초대에 응답하는 것은 누가 대신해줄 수 없다. 그렇기에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그 자유는 처음부터 완비된 것이 아니기에, 스스로 걷는 법을 체득해야만 한다. 사람마다 시기와 경로가 다르겠지만, 결국 그 길 위에서 자신을 향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며, “나와 함께 이 길을 걷지 않겠니?”하는 물음에 “예!”하고 응답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 신앙하는 법을 배우며 계속해서 걷고 있다. 이 길은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배우는 기쁨의 길이며, 교회 안에서 주님께서 동반하시는 아름다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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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