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땅에 내려와서 가장 놀라운 곳은 경북 고령군 지산동 고분군이었다. 산꼭대기 제1호 고분부터 706호에 이르는 무덤이 산등성이를 타고 장관을 이룬다. 산과 하늘과 조화를 이룬 무덤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음을 이 고분군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잔디 원형 무덤 속 죽은 영혼의 긴 침묵이 산 영혼에게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 하나임을 깨닫게 해주고, 위로와 평화를 안겨준다. 모난 삶도 무덤 앞에서는 둥글게 다듬어지고, 뛰어나고 특별한 삶도 죽음 앞에서는 겸손해진다. 무덤은 언젠가는 내가 가야 할 길, 나의 자리임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쉬는 시간이 생길 때마다 종종 고분군에 올라갔다. 어떤 무덤은 탑돌이하듯 무덤돌이 하면서 둘러보기도 하고, 어떤 무덤은 현미경으로 바라보듯 자세히 그 주변을 보기도 하고, 어떤 무덤은 그 앞에 앉아서 긴 산등성이 무덤 줄을 헤아려보기도 했다. 지금 지상에서 바라보는 무덤은 평화 그 자체인데, 무덤 속을 그려보니 가슴이 저민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당시의 장례양식인 순장제에 희생된 수많은 시종, 궁녀, 노예, 신하, 가족들의 영혼이 떠오른다. 십여 년 전 왕릉전시관을 방문한 7살 조카가 “고모, 왜 산 사람을 같이 묻어요?” 질문했을 때, 참으로 난감했던 기억도 난다. 고분군을 오를 때마다 다양한 체험을 한다. 어떤 날은 대가야의 역사가 살아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날은 현재의 삶이 갑자기 멈추어 버린 느낌을 받기도 한다.
어느 날, 한 걸음 한 걸음 발밑을 자세히 보며 걷다가 토기 조각을 발견한 것이다. 1500년 전의 살아있는 역사가 아닌가? 너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작은 조각이 얼마나 나이가 많은가? 열 살도 아니고, 백 살도 아니고, 천 살이 넘은 조각이 아닌가? 너무나 신기해서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혹시나 싶어서 주변을 자세히 둘러보는데, 또 다른 조각도 보였다. 이것이 웬일인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발굴 후 처리를 하지 않은 것인가? 토기가 너무 많아서 조각 정도는 그냥 버려진 것인가? 여기저기 흩어진 조각들을 주워서 박물관으로 가져갔다. 산으로 다시 갖다두라는 것이다. 다음 발굴 때에 조각이 짜맞춰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지산동 고분군은 마음의 고향처럼 되었다. 마음이 답답할 때도 오르고, 마음이 심심할 때도 오르고, 마음이 즐거울 때도 오르고, 누군가가 그리울 때도 오르고, 누군가가 불편해질 때도 오른다. 고분군을 오르고 내리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어느새 마음도 평정심을 찾고 몸도 균형이 맞추어진다. 11월 위령 성월에는 더 자주 올라야 할 이유가 생겼다. “오늘은 나, 내일은 너(Hodie Mihi Cras Tibi)”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이다.
9월 17일은 가야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날이다. 등재 소식을 접한 나흘 후에 곽용환 전 군수님과 노재창 전 개진면장님이 꼬미 관솔 갤러리를 방문하셨다. 가야 고분군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까지 10여 년 전부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과정을 들으니, 내 고장 고령이 더욱 자랑스러워졌다.
이날이 오기까지 누군가는 뿌리가 되고, 누군가는 줄기가 되고, 누군가는 잎이 되고, 누군가는 꽃이 되어 모두가 하나로 조화를 이루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다 같이 기쁨과 영광을 누릴 수 있구나 싶었다. 두 분의 진심 어린 방문으로 인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마음으로는 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필리 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