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대가 생명을 경시하고, 생명을 대상이자 도구로 대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보통 사람은 생명 앞에서 경외감, 압도감을 경험한다. 생명에는 놀라운 무언가가 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오직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고밖에는 생명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갓 태어난 아기 앞에서 마치 자기들이 직접 만들어낸 작품처럼 의기양양할 부모가 있을까? 부모는 자기들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생명 전달의 놀라운 과정에 자기들이 속해 있음을 경험하며, 놀랍게 주어진 선물 앞에서 감격스러워하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힘이며 존엄함이다. 누구도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생명은 인간의 손에 넣을 수 없고, 넣어서도 안 된다.
유전공학을 포함한 첨단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결코 생명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다만 생명 전달의 과정에 개입하거나 모방할 뿐.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인공지능 역시 스스로 생각하는 자율적인 생명체의 지능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지성을 모방하는 ‘인공’ 지능에 불과하다.
신앙의 전수는 생명이 전달되는 것과도 같다. 여기서 ‘생명의 전달’이란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생명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명이 태어나 자라고 성장하며 다른 생명을 낳고, 그런 방식으로 생명이 계속해서 전해지는 과정을 떠올린다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한 세대가 지나고 새로운 세대로 넘어가는 과정은 놀랍다. 우리도 한 세대에 속해 있으며, 이 시대를 살고 나면, 우리 뒤를 이어 새로운 세대가 이 땅을, 이 문화를 이어받아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것이다.
신앙 전수가 생명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세례를 통해 새로운 하느님 자녀가 끊임없이 탄생하며, 영원한 생명은 그렇게 계속해서 전달된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죄악과 죽음의 현실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산다는 의미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은 세례와 함께 완성품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삶과 개인의 삶을 통해 그 생명은 날이 갈수록 무르익는 것이며 삶에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 영원한 생명의 탄생과 완숙,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교회 안에 현존하시며 인간 삶에 새로운 창조를 가져다주시는 하느님의 힘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유아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은 아기가 앞으로 성령의 보호 아래 살기를,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 아기에게 생물적 삶만 보장해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아이가 죄와 악, 죽음과 고통의 현실 속에서 생명과 사랑을 선택하여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에 따른 삶을 살아가도록 양육하고 동반하는 것은 교회와 부모의 중요한 책무다.
부모는 갓 태어난 아기를 두 팔로 받아 안으며 깊은 감동과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 아이가 자기들 소유가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신비로운 생명 앞에서 압도감을 느낀다. 선물로 받은 아이를 하느님께 선물로 다시 봉헌하는 것, 아기가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 청하는 것, 그것은 생명 앞에 압도된 인간의 가장 깊은 열망에 대한 응답이다. 현시대의 흐름에 반대되는 구시대적인 미신이 아니라, 오히려 선물처럼 주어진 생명의 존엄함과 위대함에 걸맞은 옷을 차려 입혀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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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