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년 출생 및 선종지 미상. 교황
후안 라미레스가 그린 성 마르첼로 1세 교황의 고난. 사진=굿뉴스
마르첼로 성인은 304년 순교한 성 마르첼리노 교황 아래에서 사제로 활동하며 임무를 수행하다 308년 사도좌를 계승했습니다. 3년 반 동안 비어 있던 베드로의 주교좌가 마침내 주인을 맞게 된 겁니다. 마르첼리노 교황 선종 후 디오클레시아노 황제의 박해와 로마 교회 내부 분열로 당시 사도좌는 공석으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다 305년 디오클레시아노 황제가 퇴위하고, 이듬해 막센시우스가 권좌에 오르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후임 교황 선거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나 자료에 따르면, 마르첼로는 1년 6개월 혹은 8개월이 채 안 되는 짧은 재위 기간 중에 혼란과 분열에 빠진 교회 현실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이때 로마 교회는 박해로 상당히 피폐한 상태였습니다. 신자들의 집회 장소와 묘지가 압수되고, 배교자들이 정해진 속죄 기간을 다 채우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신앙생활에 참여하는 등 문제가 많았습니다. 마르첼로는 교회를 재정비해야만 했습니다.
「연대 교황표」(Liber Pontificialis)를 보면, 마르첼로는 로마 교회를 한 명의 사제가 각각 파견되는 25개의 본당으로 재조직하고, 본당 사제를 중심으로 예비신자 세례를 준비시키도록 했습니다. 배교자들에게는 규정된 속죄 행위를 실행하도록 했습니다. 또 본당 사제에게는 묘지 관리와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예식 집전의 책임도 부여했습니다. 아울러 21명의 새 주교와 24명의 새 사제를 서품했고, 성 프리실라의 카타콤바 반대편에 있는 살라리아에 새 묘지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노력은 배교자들을 교회에 다시 받아들이는 문제로 큰 혼란에 빠지게 됐습니다. 마르첼로는 배교자 처리 문제에 있어 엄격한 속죄 행위를 요구했습니다. 그로 인해 배교자들은 마르첼로를 사악한 적으로 간주했고, 그 결과 헤라클리우스를 중심으로 한 배교자들과 신자들 사이에서 심각한 다툼이 발생해 유혈 충돌로까지 번졌습니다. 결국 막센시우스 황제는 마르첼로를 체포해 평화의 파괴자라는 죄목으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마르첼로는 얼마 뒤 선종했습니다. 그의 시신은 로마로 옮겨져 성 프리실라의 묘지에 안장됐습니다.
마르첼로 순교에 관한 전설적 이야기를 기록한 5세기의 「마르첼로의 수난」 등은 다른 전승을 드러냅니다. 전승에 따르면, 마르첼로는 교회를 재조직하고 주교 직분을 지키면서 이교도인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제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막센시우스 황제는 격분했고, ‘마르첼로 성당’을 마구간으로 개조해 마르첼로를 그곳에서 마부로 일하게 했다고 합니다. 마르첼로는 이곳에서 신앙을 지키다 결국 눈을 감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