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가리타 클리테로우 성녀는 1556년 영국 잉글랜드 요크셔의 요크에서 부유한 양초 제조업자인 토마스 미들턴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마르가리타는 14살 때 존경받는 사업가이자 요크의 보안관이었던 아버지를 여의었습니다. 얼마 후인 1571년에는 정육점을 운영하며 그 도시의 징수관으로 있는 존 클리테로우와 결혼해 세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결혼 3년 후인 1574년 남편 존 클리테로우도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그는 영국 국교회 신자였지만, 형제 중 가톨릭 신부가 있었던 까닭에 아내의 결정을 지지했고, 아내가 교회 예배에 불참한 데 따른 벌금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마르가리타는 프로테스탄트 예배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2년 동안이나 투옥됐고, 요크 성 감옥에서 셋째 아들을 낳았습니다.
석방 후 마르가리타는 그전보다 더욱 용감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어린이들을 위한 가톨릭 학교를 세우고, 자기 집이나 혹은 빌린 집의 방을 제공해 박해 중에도 사제가 미사를 거행하도록 도왔습니다. 마르가리타의 집은 잉글랜드 내에 숨어있는 가톨릭 사제들의 은밀한 피난처 중 하나였습니다. 마르가리타는 1584년부터 1년 반 정도를 연금 상태로 지냈습니다. 맏아들을 사제로 키우기 위해 프랑스 두에로 보내 교육받도록 한 게 이유였습니다. 그는 이후 1586년 3월에 다시 체포됐습니다. 집안에 보관 중이던 전례서와 성작 등 미사 도구가 발각되면서 가톨릭 사제들의 은신처로 사용되었음이 밝혀져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온몸을 눌러 으스러뜨리는 모진 고문을 받고, 3월 25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순교했습니다.
‘요크의 진주’로 불리는 마르가리타는 1929년 12월 15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40위 순교자’ 중 한 명으로 시성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그의 축일을 순교 날인 3월 25일에 기념합니다.
그러나 영국 가톨릭교회에서는 2000년 잉글랜드와 웨일스 교회의 새 전례력이 교황청에서 승인된 이후 40위 순교자들의 축일이 5월 4일로 옮겨지면서 이때 종교 개혁 시대에 순교한 모든 복자 · 성인과 함께 ‘영국의 순교자’란 이름으로 전례 안에서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날은 종교 개혁 시대 영국에서 순교한 영국 성공회의 순교자와 성인들의 기념일과 같은 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