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라는 영화가 큰 흥행을 거두었다. ‘오컬트 미스터리’ 장르로 알려진 이 영화에는 풍수지리를 비롯한 동양의 다양한 종교-문화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전설의 고향’ 수준의 영화가 천만 관객을 넘은 흥행을 거둔 것을 보면, 메타버스나 인공지능 같은 최첨단 과학기술 시대에도 종교가 여전히 사람들에게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듯하다.
예전에는 성스러운 장소나 건물·물건 등이 늘 곁에 있었지만, 사회가 세속화되면서 성스러운 것이 많이 사라지고 생활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파묘의 흥행은 인간이란 존재에는 현대 세속 문화가 채워줄 수 없는 미스터리한 부분이 존재함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지. 아무리 첨단기술이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해도 인간은 성스러움을 필요로 하고 성스러움으로 사는 존재인가보다.
세속화와 성스러움의 회귀가 교차되는 시대에 우리는 다시 묻는다. 거룩함이란 무엇이며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에 대한 답을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찾아보면 어떨까.(루카 10,29-37) 이 이야기는 거룩함에 대한 보통 사람의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버리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강도를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상처 입고 죽어가는 이의 이웃이 되어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야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사제와 레위의 처신이다. 그들은 거룩한 일을 천직으로 삼는 이들이었다. 예루살렘을 다녀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죽어가는 이를 보고 길 반대쪽으로 피해 지나갔다는 것은, 그들의 실제 삶이 그들이 하는 거룩한 일과는 정반대되는 것임을 암시한다.
오히려 가장 속된 죄인으로 간주되던 사마리아인이 그에게 다가가 도움을 베풀고 그를 살렸다는 것은, 거룩함이 상처 입고 고통받고 죽어가는 이에 대한 처신과 관계있음을 말해준다. 이 이야기는 거룩함과 속됨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갈라놓은 것일 뿐, 진정한 거룩함은 상처 입고 죽어가는 이웃에게 도움을 베푸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거룩함이란 속된 것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가장 속되다고 여겨지는 곳에서 베푸는 자비에 달려있는 것이다.
여기서 착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다. 사마리아인의 가엾은 마음은 상처 입은 인류를 향한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이다. 그 마음은 타인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고 자기 일로 여기며, 위험을 무릅쓰고 기꺼이 응답하는 마음이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인간이 되셔서 가장 미천한 이와 하나 되셨으며, 우리가 그분과 함께 가장 미천한 자가 되도록 인도하고 계신다. 거룩함의 길은 그러한 예수님을 따르고 닮는 것에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성덕에 관한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를 통해 거룩함의 길이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평범한 일상 안에 있음을 강조하셨다. 성인성녀는 우리와 전혀 다른 분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옆집’(7항)에 사는 분들인 것이다. 가장 작은 것에서 시작되는, 그리고 가장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선을 베풂으로써 실현되는 거룩함의 길을 걸으라는 교황님의 초대인 것이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 자신이 거룩한 존재들이다. 하느님의 모상이란 상처 입고 고통당하는 이웃, 딱한 처지에 있는 이웃에게 다가가 그들과 하나 되신 하느님의 마음이다. 우리 안에 새겨진 그 마음을 새롭게 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야말로 거룩함을 회복하는 길이 아닐까.
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