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교가 일상에서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성스럽고 거룩한 것에 대해 무감각한 삶을 살게 된다. 그럼에도 성스러움과 거룩함은 인간 삶 도처에 자리한다. 오늘날 어디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필자는 ‘신을 벗기’에서 흥미로운 실마리를 발견한다. 신을 벗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단순히 집에 들어가기 위해 신을 벗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을까?
진행 중인 제16차 세계주교시노드 과정에서 ‘아시아 대륙회의 최종문서’가 작년 3월에 반포되었는데, 그 문헌에서 시노달리타스를 설명하기 위해 ‘신을 벗기’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문헌은 아시아인이 집이나 성전에 들어갈 때 신을 벗는 공통된 관행을 지니고 있음에 주목하며, 그것이 아름다운 존중의 표시이자 발을 들이는 상대방의 삶을 의식한다는 표시이며, 거룩함에 대한 깊은 인식의 표현이기도 하다고 밝혔다.(180항)
문헌의 설명대로 신을 벗는 것은 거룩함에 대한 인식과 존중의 표현이다. 또한 자기를 보호하는 것을 벗고 적나라한 자신을 드러내는 의미도 있다. 이는 성전만이 아니라 신을 벗고 들어가는 대부분 장소와 상관한다. 가령 남의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집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며 거룩함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또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초대와 환대에 대한 호의적인 응답이기도 하다.
문득 지난 5월 말레이시아에서 있었던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FABC) 신학위원회(OTC) 연례 모임이 떠오른다. 회의 중간에 우리 그룹은 부난(Bunan)이라는 공소 공동체의 추수감사 축제에 초대를 받았다. 우리는 마을에 도착해 음악대와 함께 거리를 가로질러 그분들이 살고 있는 ‘긴 집(Long house)’으로 인도되었다. 긴 집에 들어가기 위해 신을 벗고, 그들이 씌워준 목걸이를 목에 걸고 한 사람씩 인사를 나누었다.
공동체 안에 받아들여지는 예식과 인사 시간이 지난 후 그들과 함께 축제에 참여하였고 마련된 음식을 나누었다. 그들의 축제와 음식에는 거룩함이 묻어있었으며, 집안 곳곳에 삶의 생동감이 어우러져 있었다. 우리에게 신을 벗음은 그들이 사는 공동체의 삶의 자리에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 안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삶을 함께 나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또한 거룩한 삶의 자리로 초대한 데 대한 응답과 존중의 표현이었다.
수원가톨릭대 신학교에서는 수단 착의(학부 3년) 전 겨울방학 때 가정방문을 한다. 가정방문 때마다 느끼는 것은 모든 가정이 거룩하다는 것이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중해야 할 삶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가정이 거룩한 이유는 그곳이 생명이 잉태되고 태어나고 양육된 곳이기 때문이다. 성소가 싹튼 신앙의 자리이며 성소의 요람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신을 벗어야 한다. 또한 그곳에서 탄생하고 자란 학생을 동반할 때도 학생의 거룩함에 대한 표시로 신을 벗어야 한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며, 서로 존중하고 배우며 함께 하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또한 나의 치장을 벗고 적나라한 모습으로 상대를 대면하는 것이다.
오늘의 사람들이 거룩함에 대한 감각을 잃고 사람을 거룩하게 대하는 법을 잃었다면, 이제 신을 벗는 법을 배우면 어떨까. 거룩한 곳을 존중하는 법, 거룩한 곳에 다가가는 법을 배우고, 특히 인간이라는 신비롭고 거룩한 존재를 진정 거룩한 존재로 들어 높이고 섬기고 지키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우리 신앙은 거룩함 안에서 날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다.
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