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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성당 순례(3)] 남한산성순교성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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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적인 가옥, 한옥. 나무 내음이 가득한 한옥에 들어서면 선조들의 자취가 물씬 느껴지곤 한다. 교구 내 성당 중에도 조선시대를 살아간 순교자들을 기억할 수 있는 한옥 성당이 있다. 바로 남한산성순교성지성당이다.



■ 한옥으로 지은 성당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63-58 남한산성순교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남한산의 숲을 배경으로 한옥 형태의 건물이 보인다.


건물은 한눈에 봐도 주택용 한옥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연면적 296.29㎡ 규모에 철근콘크리트 구조와 목구조를 혼합한 2층 한옥 건물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형태면에서 일반적인 한옥과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본래 한옥이라면 측면에 자리할 합각이 정면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2층 구조로 높게 지어져 마치 명승지의 누각을 보는 듯했다.


무엇보다 이 한옥 건물을 누가 보기에도 성당이었다. 합각에는 붉은 십자가가 원 안에 새겨져 있었고, 겹으로 층지어 쌓인 듯한 처마 밑에는 한자로 성당(聖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수현(베르나르도) 서예가가 제작한 현판에서는 특히 성(聖)자가 눈길을 끌었다. 귀(耳)는 크게 입(口)은 작게 썼다. 귀를 크게 열고 침묵 속에서 하느님께 나를 맡기라는 의미가 담겼다. 당(堂)자는 그리스도의 피를 담은 성작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성당은 한옥으로 지어졌지만, 동시에 다양한 교회의 상징이 구석구석 담겼다. 외벽에도 십자가를 비롯해 알파와 오메가, 물고기 등의 상징물이 들어갔고, 백지사형을 당하는 순교자의 모습이 담긴 양각도 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제대를 향해 길게 뻗은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제대 뒷벽에 걸린 십자가의 예수님은 박해시기 목칼을 쓴 모습이다. 십자가 주변으로 빛이 퍼져나가는 듯한 형상이 보인다. 빛처럼 보이는 작은 조각들은 예수님의 가시관을 이루는 작은 가시들이다. 또 나무로 된 천장과 기둥 곳곳에도 장미 조각이나 비둘기 모양의 양각 등이 새겨져 있었다.


교구 내에도 한옥 구조를 지닌 성당들이 몇몇 있지만, 아직 한옥이 많이 지어지던 당시에 지은 건물이 대부분이다. 반면 남한산성순교성지는 2014년 완공,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한옥 성당이다. 남한산성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에 맞춰 신축 건물도 한옥 형태로 지어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곳이 남한산성이라는 것을 다시금 기억할 수 있었다.


남한산성은 광주 유수부(留守府)의 치소(治所), 즉 지금으로 치자면 도청이 소재한 큰 도시였다. 박해 당시 광주는 현재 광주시 지역뿐 아니라 한강 이남의 서울시 강남·송파·강동·서초구 대부분의 지역과 성남·하남·의왕시 등에 이르는 지역을 아우르는 곳이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각 지역에 사는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주고자 해읍정법(該邑正法), 즉 체포된 신자들을 거주지에서 처형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광주라는 넓은 지역에서 살다 체포된 신자들은 이곳 남한산성에서 처형당했다.



■ 영혼의 안식처


“깊은 구렁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사오니 주님 제 소리를 들어주소서.”


이곳 성당에서는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1시 미사가 봉헌된다. 미사가 끝나니 한옥 건물에 걸맞게, 구성진 우리 가락이 들려왔다. 연령을 위한 위령기도였다. 2005년 ‘영혼의 안식처’로 선포된 남한산성성지는 성당에서 매 미사 후에 위령기도를 바치고 있다.


이곳이 영혼의 안식처가 된 것은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대표적인 순교자, 복자 한덕운(토마스)의 영성을 따르기 위해서다. 성당에서도 역시 한덕운의 영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성당 좌우 창문들에는 예수님의 생애와 일곱 성사 등을 묘사한 스테인드글라스가 담겨있는데, 그중에는 한덕운의 일화를 담은 스테인드글라스도 있다.


한덕운은 충청도 홍주 출신으로 1800년 10월 경기도 광주로 이주했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교회의 상황을 살필 요량으로 행상인으로 변장해 서울을 찾았다. 서울을 돌아다니던 한덕운은 청파동에서 거적에 덮인 홍낙민(루카)의 시신을 보고 애통해하며 수습했다. 또 서소문 밖에서는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렀다.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한다는 것은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었기에, 한덕운 자신 역시 박해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덕운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결국 한덕운은 체포됐고 1802년 1월 30일 남한산성 동문 밖에서 참수로 순교했다.



성당을 나와 성지 입구 쪽을 바라보면 순교자 현양비가 보인다.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한덕운을 비롯한 21위와 무명 순교자 300여 명을 현양하기 위해 세운 비다. 현양비 옆에는 한덕운의 삶을 형상화한 ‘남한산성의 피에타’상이 있었다. 한덕운이 순교자의 시신을 끌어안고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의 동상이다.


이렇듯 한덕운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가다 마침내 순교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 뜻을 따르는 것이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여기고 이를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었다.


한덕운은 형조에서 한 최후 진술에서 “제가 한 활동은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여긴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니, 지금에 와서 형벌을 당한다고 어찌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느냐”며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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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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