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면서 자신의 아버지인 다윗과 같이(2사무 22장) 주님께 긴 기도를 바칩니다.(1열왕 8장) 8장 전체는 겹겹으로 앞뒤 대칭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로 모임(1-4), 제사(5-13), 축복(14-21), 기도(22-53), 축복(55-61), 제사(62-64), 모임(65-66) 등 장 전체가 그러하고, 둘째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름(23), 찬양과 기억(23-28), ‘눈을 뜨시고’(29), 일곱 청원(31-51), ‘눈을 뜨시고’(52), 찬양과 기억(53), 하느님의 이름을 부름(53) 등 기도 부분(22-53)도 그러합니다. 성전 봉헌에서 기도가 중심입니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신 분이고 예수님도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전, 교회 건물이 기도에 꼭 필요한 것일까요? 솔로몬은 기도의 시작에서 이미,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하느님을 모시기에 턱없이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어찌 하느님께서 땅 위에 계시겠습니까? 저 하늘, 하늘 위의 하늘도 당신을 모시지 못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집이야 오죽하겠습니까?”(27) 하느님은 ‘짙은 구름 속에’ 계시지만(12) 성전을 향해 올려지는 기도와 간청과 부르짖음을 ‘눈으로’ 보시고 들어 주십니다.(28-30)
성전은 ‘하느님께서 굽어보시고 들으시는 특별한 자리’이고 사람이 집중적으로 기도하는 장소입니다. 성전에서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고 성경을 통해 하느님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래된 성당에 앉아 있으면 고요함 속에 갑자기 지난 세월 동안 거기에서 근심 보따리를 하느님 앞에 풀어 놓았던, 기쁨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한 수많은 신앙의 선인들이 되살아나고 시간을 초월해 인간을 살피시는 하느님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지만 성전에서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모든 성인의 통공을 특별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왕은 마치 사제처럼 백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교황님은 매주 수요일 일반 알현 때와 주일 삼종기도에서 전 세계에서 일어난 중요한 일을 언급하시고 그 일을 겪은 이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자고 부탁하십니다. 주교님들과 신부님들도 각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개인은 각자의 기도를 바치지만, 그것이 하느님께 올리는 기도의 전부일 수 없습니다. 공동체 안에는 전체를 대표해서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 사회는 시멘트와 모래로 만든 튼튼한 콘크리트가 아니라 바람에 끊임없이 흩날리는 사막의 모래알과 같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느님께서 사회에서 생긴 갈등을 의롭게 판결해 주시기를(31-32), 적과의 싸움에서 도와주시기를(33-34.44-45), 가뭄 때 비를 내려주시기를(35-36), 온갖 환난과 질병에서 개인이나 전체를 도와주시기를(37-40), 이방인을 도와주시기를(41-43), 장차 바빌론의 포로가 될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해 주시기를(46-51) 청합니다. 이 집을 향해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는 내용은(48)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 실제와(다니6,11) 메카를 향해 기도하는 무슬림들의 관습을 연상시킵니다.
솔로몬은 거듭해서 “용서해 주십시오”(30.34.36.39.50)라고 청합니다. 우리는 매일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청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인 우리를 늘 새로이 용서해 주심을 우리가 알고 있음에도 다른 이들을 용서하는 데에서 어려움을 겪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전쟁과 우리 사회의 심각한 갈등 뒤에는 상대방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증오가 자리합니다. 용서는 삶의 기회를 주는 것이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샬롬)의 길이자 기도의 목적입니다.
글 _ 신정훈 미카엘 신부(서울대교구 해외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