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기존 생각을 뒤집고,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와 행성이 그 주위를 돈다는 주장을 펼친 사람이다. 그가 가져온 생각의 전환은 당시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지만, 이제 아무도 지구가 중심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신앙이 어려운 이유는 신앙이 일종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그리스도 신앙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룬 사랑”이라고 하셨다. 곧 지금까지 세상의 중심이 ‘나’였다면, 그래서 나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고 있었다면, 그리스도인에게 중심은 하느님이시며, 그분을 중심으로 세상 모든 것이 돌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흘러넘치는 사랑과 은총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 삶을 보면 그것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 이기적이고 나약한 인간임을 절감하기에 불가능한 일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문득 프랑스 유학 시절,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라는 말 자체를 싫어한다고 말씀하신 어학 학교 선생님이 떠오른다. 말로는 남의 입장에서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경험하고 말할 수 있을 뿐, 결코 남의 입장을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인간의 가장 큰 한계 중 하나는 타인의 처지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하지 못한다는 데 있을 것이다.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이렇게 말씀하신 적 있다. “아유, 딱해라. 어떻게 하나. 내가 대신 아파 줄 수도 없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우리는 대신 아파할 줄 아는 존재이기도 하다. 자녀가 아프면 부모는 잠을 못 자고 아이 옆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친구나 지인, 소중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생기는 일은 자기 일처럼 다가온다. 죽어가는 누군가를 보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간다면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길에서 강도를 만나거나 폭행당하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피해를 안 보는 최선의 방법일 수는 있지만, 양심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안위를 살피지 않고 바로 행동한다.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9·11 테러가 있었을 때, 프랑스 친구 신학생 한 명이 며칠 동안 밥을 못 먹었다고 했다. 테러의 충격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대륙에서 일어나는 비참한 일이 지금 나와 상관한다는 것을 알고 고통을 함께 느끼는 사람이 진정 인간다운 것이 아닐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타인이라는 한계를 넘어선 분이셨다. 그분에게 드신 ‘가엾은 마음’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번민 등을 그분께서 실제로 겪으셨음을 말해준다. 그분은 인간이 겪은 모든 것, 심지어 죽을 운명까지도 당신 것으로 하셨다. 죽음 앞의 번민으로 피땀을 흘리며 괴로워하셨으며, 마음이 심란하여 죽을 지경이라고까지 고백하셨다. 수난을 겪으시며 온갖 모욕과 조롱을 겪으셨고, 십자가 위에서는 모든 이로부터 버림받은 이가 되셨다.
그런데 그것이 실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의 표지였다. 타인이란 경계를 뛰어넘어 당신 자신을 위해 어떤 것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내어주신 사랑, 마지막 숨까지 ‘내어주신’ 사랑이다.(요한복음 원어는 ‘숨을 거두신’ 것이 아닌 ‘숨을 내쉬신’ 것으로 표현한다. 요한 19,30 참조)
사랑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그것은 어렵지만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 척박한 이 세상에 인간미가 넘치게 하고, 사람이 서로에게 희망을 둘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