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대중가요가 사랑을 노래한다. 그토록 많은 사람이 부르고 또 불러도 결코 질리지도 고갈되지도 않는 것이 사랑이다. 그처럼 사랑은 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그 노랫말에는 주로 이별·상처·슬픔·괴로움 등이 담겨있다. 어째서 우리 사랑은 그런 것일까? 어쩌면 사랑이 우리의 연약함을 관통하기 때문은 아닐지. 인간이란 연약한 존재이기에, 사랑이 인간의 연약함을 관통하다 보니 그토록 많은 상처와 아픔을 겪는 것은 아닐지. 그런데 달리 생각해보면, 그러한 실패와 상처와 아픔의 순간들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성장하고 영글고 익을 수 있었을까. 그렇기에 실패한 사랑은 없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사랑은 연약함을 관통하기에, 우리는 시련의 순간들을 겪고 이겨내며 계속해서 무르익고 성장해 가는 것이 아닐까.
외국에서 공부하면서 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리워했던 것은 부모님과 가족 그리고 신자들의 사랑이었다. 내가 그때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 사랑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순수한 사랑, 보답도 바라지 않고 그저 나의 존재 자체를 사랑해주는 사랑 말이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을 먹고 살아왔다. 그 사랑이 우리를 먹여주었고, 양육시켜주었다.
물론 그 사랑은 지극히 인간적인 사랑이기에, 순수함이 바래지고, 여러 이유로 시련을 겪는다. 서운함과 배신을 경험하기도 하고, 상처를 입고 충격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실은 우리 모두가 그렇게 약함을 지닌 채 사랑해 왔다는 것을 결국은 인정하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차원의 사랑을 바란다. 나를 끝까지 믿어주고, 끝까지 나의 편이 되어주는, 나의 상처를 보듬어 안아주고, 한없는 위로로 나와 끝까지 함께하는 사랑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그러한 사랑을 받아왔음을 깨닫는다. 특히 삶에 큰 위기나 시련이 닥칠 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허탈함과 우울감에 휩싸일 때,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곁에 계시며 지켜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발견한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참조)에서 작은 아들은 돼지를 치면서 자기 곁에 아무도 없음을 깨달았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고 보살펴주지도, 먹을 것을 주지도 않았다. 누군가 관심을 갖고 먹을 것을 줄 때 채워질 수 있는 것은 물질적인 배고픔이 아닌 바로 사랑의 배고픔이다. 작은 아들은 그러한 사랑을 간절히 바랐고, 그제야 아버지 집에서 받았던 사랑, 품팔이꾼조차 먹을 것이 남아도는 ‘흘러넘치는’ 사랑을 떠올렸다. 그 사랑이 자기를 이제껏 살게 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하느님 사랑의 특징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점이다. 조건을 달지 않으신다. 마치 우리의 존재 자체가 선물이요 기쁨인 것처럼 우리를 바라보신다. 그저 있는 자체로 당신 마음에 들기에 우리를 사랑하신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고 소중히 보살펴주는 사랑, 바로 그러한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한다.
작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조건을 달지 않았다. 그저 아들이 돌아와 준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느님께서 바로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아들을 받아준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그렇게 받아주신다. 추궁하거나 따지지 않으신다. 혹은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가 혹시나 돌아오지 않을까 노심초사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이며,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한다.
이제 우리 마음 깊은 곳의 간절한 열망의 대상인 바로 그 사랑으로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