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청년들과 독서 모임에서 「그러니 십계명은 자유의 계명이다」(분도출판사, 2012)라는 책을 읽고 나눔을 한 적이 있다. 보통 계명을 속박이나 구속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그와 반대로 계명이 자유를 준다는 말이 흥미로웠다. 십계명을 하나씩 짚어가며 어떻게 각 계명이 우리에게 속박이 아닌 자유를 주는 계명인지 설명해주는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들 공감하는 분위기였던 기억이 난다.
사실 계명 없는 삶이 자유로울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 참조)에 나오는 작은아들의 경우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세속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살 때 그 결과가 자유가 아닌 초라하고 속박된 삶임을 말해준다. 오랜 냉담 끝에 하느님께 돌아오는 이유는 하느님 안에서만 진정한 자유와 행복,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십계명은 자유를 주는 계명이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계명을 마음을 다스리는 법으로 받아들였음을 정하상 성인의 「상재상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무릇, 사람의 허물이라 하는 것이 처음에는 그 마음에서 시작하나, 나중에는 그 일을 해롭게 하는 것인데, 세상의 법은 그 일만을 다스리고 그 마음은 다스리지 못하나이다. 그러나 천주의 명은 그 일을 다스릴 뿐 아니라, 또한 그 마음까지도 다스리는 것이오이다.”
필자는 계명이나 규정 같은 것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겨왔다. 자유분방함을 추구했고, 그것이 멋지고 세련된 것인 줄 알아왔다. 그로 인해 방황도 많이 했고, 힘든 시기도 수차례 경험했다. 특히 유학 시절은 필자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 과정에서 계명이나 규정의 중요성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인간이란 연약하고, 인간의 자유란 불완전하기에, 양성이 필요하고 테두리가 필요함을 깨달았다. 법의 테두리는 나의 자유를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얻도록 하는 보호막인 것이다. 그리고 자문해 본다. ‘만약 내 인생에서 계명이라는 테두리가 없었다면 나는 어떤 인간이 되었을까?’ 불편했지만 계명과의 싸움이 필자를 성장시켜줬음을 깨닫게 된다.
자연스럽게 필자를 키워주신 분들을 생각한다. 부모님, 선생님, 교리교사님, 신학교 교수 신부님들?. 모두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필자를 이끌어주신 분들이다. 자유롭게 놓아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으셨다. 그러고 보면 계명에는 사랑과 배려가 담겨 있다. 사랑하는 자녀나 학생에게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어렵고 괴로운 일이지만, 사람답게 키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기에 자녀와 제자에게 규정을 부과하면서 그분들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신 것이다.
이제 양성하는 입장에서 필자 역시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사랑이 아니고서는 계명을 부과하지 못한다는 것도 깨닫는다. 사랑이 빠진 계명은 남의 자유를 속박하는 권위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또한 계명을 부과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고백하게 된다. 어떤 인간도 법과 계명 위에 위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계명은 인간이 존재에 대해 배우고, 자유에 대해 배우며, 사랑에 대해 배우는 장소다. 신앙생활에서 지켜야 할 계명에 담긴 하느님의 마음은 연약하고 유혹과 죄에 빠지기 쉬운 인간이 죄악에 속박되지 않고 아버지의 자녀로서 온전한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한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이다. 십계명에 담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의무로 지켜야 할 계명이라기보다 그것을 지킴으로써 배워야 할 하느님 마음이 아닐까. “그러니 십계명은 자유의 계명이다.”
한민택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