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27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순례, 걷고 기도하고] 마산교구 명례성지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남단. 굽이굽이 낙동강을 따라 비옥한 평야가 펼쳐진 지역이다. 푸른 강물을 보려 고개를 돌리면 넓은 강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계절 따라 온갖 꽃들이 피고 지는 곳. 옛 지명은 멱례 혹은 미례였고, ‘돌무더기 나루터’라는 뜻의 ‘뇌진(磊津)’으로도 불렸다. 옛사람들은 이곳에서 배를 타고 강 건너편 김해로 건너가 창원, 마산까지 다녀오곤 했다. 육상교통이 발달하며 나루터는 사라졌지만,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명례마을은 여전히 남아있고, 언덕마루에 있는 ‘성모승천성당’(전 명례성당) 역시 굳건한 모습으로 순례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푸르름이 넘치는 5월, 명례성지(담당 박진우 아우구스티노 신부)를 찾았다.



복자 신석복과 강성삼 신부


‘명례(明禮)’는 한국교회사에서 익숙한 지명이다. 1784년 하느님의 종 김범우(토마스)의 집에서 ‘한국 최초의 신앙 공동체’라 불리는 모임이 열렸다. 김범우의 집은 한성(서울) 명례방(明禮坊)에 있었다. ‘방(坊)’은 조선시대 행정구역을, ‘명례(明禮)’는 ‘예절을 밝힌다’는 의미로, 유교적 가치를 담아 마을에 붙인 이름이었다. 밀양의 명례는 옛 지명을 한자어로 바꾸면서 소리와 뜻을 고려해 이름 지은 것이라 알려져 있다. 한성과 밀양, 두 지역의 ‘명례’는 시대의 예법을 따르라는 이름을 붙여 관리할 만큼 중심지였다. 하지만 지명이 무색하게도, 그 예법을 따르지 않는 이들이 꾸준히 나왔고 조선은 그들을 박해했다.


1828년 밀양의 명례에서 복자 신석복(마르코)이 태어났다. 박해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교우들이 명례에 닿았고, 양반가 자제인 신석복에게 신앙을 전한 것이라 추측된다. 신석복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입교했고, 이후 장사를 시작했다. 미사 참여, 전교, 타 지역 교우들과의 만남 등 강을 건널 일이 많았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의심받지 않으려 행상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신석복은 붙잡혔다. 짐 보따리에서 누룩, 소금과 함께 기도서와 성물이 나오면서 그는 대구로 압송됐고, 배교를 권하는 이들에게 “풀어준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이라며 굳게 신앙을 고백하고, 39세 나이에 순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흐른 1887년, 마침내 명례에 공소가 생긴다. 공소는 1896년 명례본당으로 승격됐는데, 이는 마산교구 관할인 경남 지역 첫 본당이었다.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인물도 한국교회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분이었다. 강성삼(라우렌시오) 신부. 강 신부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에 이어 세 번째로 서품받은 한국인이었고, ‘한국 땅’에서 품을 받은 첫 사제이기도 했다. 서품 당시에도 건강이 좋지 않았던 강 신부는 첫 사목지 명례본당을 마지막으로, 1903년 38세에 선종했다.




하나의 성지가 품은 두 성당


순례객이 가장 먼저 만나는 건 ‘라우렌시오의 집’이다. 너무 빨리 떠나버린 초대 주임 강성삼 신부를 기리는 흰색 단층 건물은 사무실과 성물방, 카페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확 트인 통창으로 고즈넉한 ‘강변 뷰’를 즐길 수 있다. 이 건물을 지나면 오르막길이 나온다. 야트막한 길을 따라가면 왼쪽으로 성모동산이 펼쳐진다. 초록 잔디밭에 성모상과 함께 십자가의 길 14처가 조성돼 있는데, 하나씩 각 처를 밟아가면서도 눈길은 자꾸만 저 멀리 강으로 향한다. 강물이 각 처의 배경처럼 반짝이는 곳. 인근에서 가장 높은 언덕마루에 올랐기에, 시야를 가리는 건축물이 거의 없다는 것도 성지의 큰 장점이다. 유유히 흐르는 물결을 바라보며 기도인지 묵상인지 모를 망중한을 즐긴다.


성모동산 맞은 편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성모승천성당’이 보인다. 현재의 성당은 세 번째로 지어 올린 건물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성전 모두 태풍으로 완파됐다. 두 번째 태풍 피해를 입었을 때 파손된 성당 잔해 속에서 목각의 ‘승천성모상’이 손상 없는 상태로 발견됐고, 이를 본 당시 회장 김유인 씨는 사재를 털어 1938년 기존 성당을 축소 복원한 후 성전 제대 가장 위쪽에 승천성모상을 모셨다. 이후 지금까지 성전은 온전히 유지됐고, 남녀석이 구분돼 있는 옛 형태 등의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됐다.


한옥성당 옆으로 이어지는 너른 마당. 이곳에서부터 성지는 새로운 느낌으로 순례객을 이끈다. 고전미와 자연풍광을 즐기던 곳에서 현대 건축물을 통한 사유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다.




마산교구 이제민(에드워드) 신부가 수소문 끝에 신석복의 생가터를 찾은 건 2006년. 생가터는 교구 첫 본당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그곳에 축사가 들어서 있었다. 신석복이 포함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가 이어지던 시기. 그럼에도 순교자 삶의 터전은 완전히 버려진 상태였다. 이 신부는 교구에 모든 내용을 전했고, 이 무렵부터 성지 개발을 위한 발걸음들이 시작됐다. 


2009년부터 10년간 성지 담당 사제로 헌신한 이 신부는, 모든 재정비를 진두지휘하며 성지 조성을 위해 ‘녹는 소금 운동’을 펼치며 모금을 진행했다. 성지 계발이 한창이던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신석복은 복자로 선포됐고,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신석복 마르코 기념성당’이 2018년 완공되면서 성지는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너른 마당 커다란 제대가 놓인 자리가 바로 신석복 복자의 생가터다. 제대 맞은편으로는 계단 모양의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야외 미사 봉헌 때에 신자들이 앉기도 하는 이 공간이 기념성당의 지붕을 겸한다. 경관을 방해하지 않고 언덕과 능선을 해치지 않으려 지면 아래에 성당을 둔 것이다. 눈에 띄는 건 불규칙적으로 놓여있는 12개의 사각형 구조물들. 이는 녹아 없어지며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소금 영성’을 형상화한 것으로, 각각의 사각형에 창이 있어 지상에 닿은 빛이 지하 성전까지 이어진다.


소금을 통해 들어온 빛이 밝히고 있는 성전에 들어섰다. 잿빛의 공간은 절제?침묵 등의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곳이었다. 공간에 압도된 듯 숙연해진 마음으로 제대 쪽으로 나아가면 제대 왼편에서 ‘부활경당’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 신석복 복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고향 땅에 돌아오기까지 걸린 세월은 150여 년. 대구에서 순교한 복자의 유해를 아들이 찾아왔지만 당시 마을 사람들이 반대해 명례에 들이지 못했고, 교우들이 머물던 장방리 노루목에 모셨다가 1975년 진영천주교공원묘지로 옮긴 후 2018년 이곳으로 다시 이장했다.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복자의 삶과 죽음을 기억한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성지 담당 박진우 신부는 “미사도 봉헌되지 않던 한옥 성당이 지금까지도 온전히 남아있는 건 주변 신자들이 꾸준히 돌봤기 때문”이라며 “그런 정성들이 모여 긴 세월을 버텨낼 수 있었고, 그 시간들 끝에 순교자의 유해를 품고 성모님께 안긴 지금의 모습이 됐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녹여내 세상을 돕는다는 ‘소금 영성’. 그 영성이 성지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낡고 무너지는 것이 당연한 이치임에도, 이곳 명례성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굳건히 위용을 갖춰가고 있었다.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시간과 정성을 녹여낸 것일까.


성지를 나서는 길. ‘명례성지 기도문’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마음의 문을 열어 세상의 평화를 위하여 녹아 사라지는 소금이 되겠습니다’하고 고백하며 살게 하소서.…’



◆ 순례 길잡이 주소: 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안길 44-1

미사: 오전 11시(화·수·목·금요일), 토 오후 4시, 일 오전 11시

후원 계좌: 351-1067-2746-63 (재)마산교구천주교유지재단

문의: 055-391-1205 명례성지 사무실

이나영 기자 lala@catimes.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6-05-27

관련뉴스

말씀사탕2026. 5. 27

시편 4장 8절
주님, 저들이 곡식과 햇포도주로 푸짐할 때보다 더 큰 기쁨을 주님께서는 제 마음에 베푸셨나이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