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의 향기] (8)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역사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1209년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성 프란치스코와 형제들의 생활 양식을 구두로 인준함으로써 시작됐다. 엄밀한 의미에서 수도회는 본래 ‘작은형제회’라는 공식 명칭을 지닌 하나의 수도회였지만 성 프란치스코의 선종 후 수도회 내외적 상황 변화와 수도규칙 준수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내부적으로는 크게 두 분파로 나뉘었다.
한 분파는 수도규칙의 근본 정신은 유지하되 변화한 상황 및 교회 지도에 따라 그것을 해석하고 준수하며 세상과 교회 요구에 응답하고자 한 공동체 형제들이었다. 다른 분파는 수도규칙을 글자 그대로 엄격하게 준수하는 것을 추구한 형제들이었으며 여러 갈래의 개혁 프란치스칸으로 이어졌다. 1517년 두 분파는 레오 10세 교황 칙서 「Ite vos」에 의해 법적으로 두 수도회로 분리되었으며, 공동체 형제들은 ‘꼰벤뚜알 작은형제회(OFM Conv.)’라는 명칭으로 오늘에 이르게 됐다.
분리될 당시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는 2만 5000명~3만 명의 수도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세상과 교회의 요구에 응답한다는 꼰벤뚜알 영성에 따라 주로 도시 안에서 큰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리고 교회의 사목 활동·학문·사회복지·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며 사람들과 함께했다. 일례로 18세기 빈 고전파를 대표하는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당시 유럽의 손꼽히는 음악 이론가이자 교육자였던 조반니 바티스타 마르티니 수사로부터 수준 높은 대위법과 음악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도시 안에서 큰 공동체를 이뤄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점은 한편으로 부메랑이 되었다. 개혁 프란치스칸들의 외딴 은수처와 달리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의 수도원은 유럽의 세속화 물결 속에 교회와 수도회 재산을 질시하던 세속 권력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이 많았던 프랑스에서 일어난 프랑스 혁명으로 많은 수도원이 정부에 몰수되거나 파괴됐으며 신앙을 버릴 것을 거부한 많은 형제가 혁명 세력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개신교의 등장은 독일과 영국·북유럽에서 형제들의 현존과 활동을 위축시켰으며, 이슬람 세력의 동유럽 침공은 그 지방 수도원과 형제들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한때 형제들이 수만 명에 달하던 수도회는 19세기 말엽 형제 수가 1481명으로 크게 줄면서 존폐 위기를 맞았다.
이 위기 속에 수도회는 유럽을 벗어나 아메리카와 아시아 등 다른 대륙으로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1958년 대한민국 부산에 두 명의 수도자가 도착하면서 이 땅에 수도회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들은 중국 선교를 하던 중 공산화로 추방당한 이탈리아 파도바 관구의 프란치스코 팔다니(한국명 범덕례) 신부와 일제강점기 성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에 의해 수도회가 이미 진출한 일본에서 입회한 허철(안드레아) 신부였다. 수도회는 부산 범일동본당 사목을 거쳐 이후 부산 대연동과 일광, 대구 범어동에 수도원을 세우면서 본격적으로 터전을 잡았다.(범어동 수도원은 1996년 월배로 이전) 1960년대 중반에는 서울 한남동에 진출하면서 점차 수도권으로 그 터전을 넓혀갔다.
현재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한국 관구는 8개 수도원에서 60명의 종신서원자들이 본당 사목과 피정 지도·성모기사회 지도·재속프란치스코회 영적보조·사회복지·출판사업·JPIC 등 다양한 사도직을 수행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수도회는 전 세계적으로 약 3200명의 종신서원자들이 있으며 이 중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서임된 3명의 추기경도 포함된다.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은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진 교회의 고위직부터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낮은 자리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세상이 필요로 하는 곳에서 함께 호흡하며 복음과 프란치스칸 영성의 향기를 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