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6년 어느 겨울, ‘마태오’라는 프란치스코회 수도자가 서둘러 수도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추위로 몸을 떨고 있던 한 거지와 마주쳤다. 그는 자기 외투를 그 거지에게 벗어 주면서 한편으로 거지와 달리 좋은 건물에서 걱정 없이 살고 있는 자신이 과연 아시시의 가난한 자, 성 프란치스코를 제대로 따르고 있는지 되묻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마태오 형제뿐만 아니라 작은형제회의 역사 전반에 꾸준히 등장해 왔던 주제였다. 형제들의 폭발적인 증가로 지어진 큰 수도원 건물들, 특히 이런 형제회의 눈부신 성공은 형제들을 초기 이상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교회 쇄신의 주역들인 형제들은 점차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고, 교회가 요구하는 사목자를 양성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이상을 현실에 적용하는 고민은 오늘날 교회가 그러하듯 프란치스칸들에게 쉽게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타협하며 살기에는 성 프란치스코가 보여준 복음의 빛이 너무도 강렬했다. 카를로 카를레이 감독의 영화 ‘Padre Pio’에서 비오 성인은 말한다. “성 프란치스코의 가장 큰 기적은 700년이 지난 지금도 젊은이들을 수도회로 부른다는 거요.” 완전한 가난을 단순하게 실천한 성 프란치스코에게 매료되어 일생을 건 이들에게 초기 이상을 향한 열망은 자신들의 꿈과 정체성에 지울 수 없는 유전자와도 같은 것이었다.
고민의 답을 얻을 때까지 계속 기도하던 마태오 형제는 어느 날 꿈에 길고 뾰족한 후드 모자가 달린 수도복을 입은 성 프란치스코를 보았다. 그는 즉시 프란치스코를 닮으려는 열망을 표현하고자 자신의 수도복 모자를 그와 같이 고쳐 달았고, 이런 마태오 형제를 따라 하는 형제들이 급격히 늘면서 개혁의 불길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카푸친’이란 이름 역시 개혁의 상징이자 카푸친 수도복의 특징인 ‘모자’를 뜻하는 말 ‘카푸치오(cappuccio)’에서 유래된 것이다.
하지만 개혁의 여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작은형제회는 이미 한 차례 개혁 운동으로 꼰벤뚜알과 분리되는 갈등을 겪었다. 어떤 형제들은 가난에 대한 열의가 지나쳐 교회에 불순종했던 ‘발도파’ 이단과 같은 길을 걸었다. 개혁은 충분히 이루어졌으니, 이제는 순종 아래 형제회가 일치하는 게 더 중요했다. 이런 와중에 수도복을 고쳐 입는 형제들은 외적인 모습에 치중한 바리사이파들이나 또 다른 반동분자들로 여겨지고 있었다.
개혁과 일치, 양쪽 주장이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형제들은 어디를 향할 것인가? 이처럼 공동체와 신앙인의 삶에서도 수많은 갈림길을 만난다. 사실 어느 쪽도 틀린 말은 없다. 문제는 그 속에서 본질을 식별하는 일이고, 이것이 개혁의 참된 의미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은 언제나 합리적이지 않고, 처음의 순수한 열정이 자칫 상대를 잘못됐다고 비난만 하며 갈등과 상처로 끝날 때도 많다.
카푸친 형제들은 외부의 비난과 위협 속에서도 기도 안에서 평화를 잃지 않고 인내롭게 하느님의 뜻을 찾아갔다. 개혁은 잘못을 바로잡는 합리적 의사 결정이나 자기 열정을 관철하는 일이기 전에 우리를 바른길로 이끄시는 하느님께 귀 기울이는 데서 시작된다. 그렇게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하느님의 섭리는 성 프란치스코의 본래 정신을 형제들 마음 안에 새롭게 일으키셨고, 마침내 1538년 클레멘스 7세 교황은 칙서 「Religionis Zelus」를 통해 카푸친을 독립된 수도회로 공식 인준하였다. 그러나 진짜 시작은 이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