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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의 가난은 사랑이었다

[프란치스코의 향기] (11) 자기를 버리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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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작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껴안은 성 프란치스코’. 출처=위키미디어


작은 꽃 한 송이에서도 창조주의 얼굴을 알아본 섬세한 사람, 지저귀는 새들과 함께 하느님을 찬미했던 성 프란치스코의 서정적인 이미지는 그의 전기들은 물론, 후대의 많은 예술가에게 아름다운 영감을 불러일으켜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프란치스코 성인이 직접 쓴 몇 안 되는 글들에서는 이와 사뭇 다른 강한 어조에 정신이 번쩍 든다. 이러한 프란치스코의 상반된 얼굴에는 그가 엄격히 강조했던 ‘가난’이라는 주제가 깃들어 있다고들 생각한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지만 모든 걸 포기하고 누더기 수도복을 입은 채 소유 없이 살았던 프란치스코. 오늘날에는 예수님조차 프란치스코회 재산을 다 모른다는 농담이 있지만, 프란치스칸들에게 가난은 언제나 쇄신의 주요 동기가 되어왔다. 성 프란치스코의 본래 정신으로 쇄신하겠다던 카푸친 형제들이 가장 먼저 가난에 열정을 쏟은 까닭이다. 그러나 프란치스코의 궁극적인 목적은 금욕적 수련이나 가난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 전부를 버리는 데 있었고, 가난은 이러한 ‘자기 버림’에 뒤따르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사랑은 깊어질수록 자신을 희생하여 상대에게 모든 걸 내어준다. 이런 사랑의 속성이 없다면 서로 손해를 감수하고 결혼할 수도, 헌신적으로 자녀를 키울 수도 없다. 성 프란치스코에게 그 사랑의 극치는 바로 예수님의 ‘육화’로 드러났다.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오히려 종의 모습을 취하신’(필리 2,6-7 참조)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 교회 최초로 성탄 구유를 만들었을 만큼 성 프란치스코의 온 마음을 사로잡은 이 육화된 사랑이 그를 예수님과 함께 가난 속에 뛰어들게 했다.

나아가 성 프란치스코는 마치 죽은 시체처럼 순종해야 한다며 ‘순종’을 가난과 자기 버림의 결정체로 보았다. 성인 복자가 된 많은 카푸친 형제 역시 가난과 더불어 영웅적인 ‘순종’을 보여주었다. 그 가운데 카푸친 성인 니코시아의 펠릭스(1715~1787)는 심지어 임종 때도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좋다’는 원장의 허락에 숨을 거뒀다고 전해질 정도로 순종의 덕을 온전히 인격화한 성인이었다. 사실 그의 원장은 수도생활 내내 모욕과 비방을 일삼으며 그를 몹시 괴롭혔는데, 그럼에도 펠릭스 형제는 그 모든 불의 앞에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라는 말로 순종함으로써 자기를 버리는 순종으로 하느님의 큰 사랑을 드러내신 그리스도를 닮아갔다. 그렇게 그는 순종에 따르는 많은 고통을 통해 성 프란치스코가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받은 오상을 다른 방식으로 받았던 셈이다.

오늘날 순종은 자기 학대라거나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수도원을 비롯해 나약한 인간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불의는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러한 불의 속에 권력과 전쟁 무기가 자신을 지키고 정의를 세울 수 있을 것 같지만, 예수님이 그랬고, 그 사랑에 응답한 성 프란치스코가 그랬듯이 오히려 먼저 자기를 내려놓는 누군가가 더욱 필요한 시대다.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만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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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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