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득 신부의 프란치스코의 향기] (14) 시대를 관통하는 복음적 가난과 교회와 변방으로 나아가는 교회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프란치스코 교황을 영적으로 결속시키는 가장 강력한 복음적 실천은 바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삶 또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입니다.
12세기 말과 13세기 초, 유럽은 온화한 기후와 농업 생산성의 폭발적 증가로 인구가 급증하고 장거리 무역이 재활성화되면서 화폐 경제 시대로 재진입했습니다. 아시시와 같은 상업 도시에서는 성장이 시작되었지만, 이윤 극대화와 무한 경쟁 속에서 극심한 빈부 격차가 발생했습니다. 아시시 인구의 10는 구걸에 목숨을 걸었고, 20는 고정 자산 없이 적은 일당으로 연명했습니다.
서로 가치가 다른 황제 발행 화폐와 교황 발행 화폐의 동시 순환에 따른 사회적 불안정성도 팽배했습니다. 특히 귀족 계급과 신흥 평민층의 군사적 반목 속에서 프란치스코 역시 페루자와의 전투에 참전해 포로가 되어 12개월간 독방에 투옥되는 혹독한 시련과 투병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회 구조 속의 소외와 폭력은 평화와 복음적 가난을 향한 깊은 갈망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부유한 포목상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의 아들로 태어나 세속의 성공과 기사 작위를 꿈꾸던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사회적 아픔 속에서 회개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의 회개의 결정적 전환점은 사회적 격리 대상이었던 한센병 환자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한센병 환자들의 썩어가는 상처를 씻어주고 그들에게 입을 맞추며, 가난하고 멸시받는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상인 출신이었던 프란치스코는 당대 경제 체계에 매우 친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형제들에게 어떤 형태의 금전이나 돈도 돌덩이보다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며 절대 소유하지 말 것을 가르쳤고, 당대의 이윤 극대화 체제에 온몸으로 맞섰습니다.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어린 시절 할머니 로사로부터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신앙과 검소함의 가치를 배웠습니다. 청년 시절 화학을 공부하면서도 친구에게 “예수회 사제가 되어 빈민촌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고 고백했던 그는 대주교가 되어서도 거대한 주교관 대신 작은 방을 선택했고, 스스로 밥을 지어 먹으며 대중교통을 이용해 가난한 신자들의 삶에 언제나 깊이 동참했습니다.
이 두 프란치스코에게 있어 가난이란 단순히 도덕적 금욕이나 개인의 수덕생활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서 오직 하느님의 주권과 소유권을 고백하며, 모든 좋은 것을 하느님과 원래의 주인인 가난한 이들에게 기꺼이 되돌려주는 정의의 실천이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동냥은 가난한 이들에게 마땅히 돌려주어야 할 그들의 유산이자 권리”라고 가르쳤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과 나누지 않는 행위는 그들의 것을 훔치고 생명을 빼앗는 무서운 불의이자 하느님의 소유권에 도전하는 대죄라고 지적했습니다.
나아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간을 유용성에 따라 ‘쓰고 버리는 문화’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무자비한 ‘배척의 경제’에 단호히 맞섰습니다. 그는 교회가 법적 안정감과 안락함의 성벽 뒤에 안주하지 말고, 기꺼이 밖으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지더라도 소외된 이들이 존재하는 ‘실존적 변방’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두 프란치스코는 가장 미천한 이들의 삶 속으로 친히 들어가셨던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것만이 교회가 가야 할 길임을 우리에게 명확히 보여줍니다. 그들이 걸었던 변방의 길은 소외된 이들과 하나 되어 사회 구조적 모순을 치유하고 참된 복음적 우애를 꽃피우는 성스러운 지평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