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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참고 이해하는 것 밖에 없죠.
아내를 받아들이면 사랑은 자연스럽게 따라와요."
다문화 가정이 연간 혼인건수의 11(3만8000건, 2008년 통계청)를 넘어섰다. 주교회의 가정사목위원회 위원장 황철수 주교는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12월 28일)을 맞아 발표한 가정성화주간 담화에서 "다문화 가정은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 소수가 아니다"며 "`다름`을 수용하고 `공존`을 선택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절박한 과제로, 이를 복음적으로 풀어나갈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국인 아내들은 여느 한국인 아줌마처럼 가족을 사랑하는데 스스로 희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들을, 다문화 가정을 껴안는데 아직 인색하다. 이제 함께 서로의 어깨를 보듬을 때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결혼 5년차 유근수(44)ㆍ베로니카 비라이(34)씨 부부. 이들 가정의 새해 아침은 더욱 눈부시다.

▲ -"우리 아이들 참 예쁘죠?" 유근수ㆍ베로니카 비라이씨 부부가 아이들(유진ㆍ유민영ㆍ유지연) 손을 잡고 2009년을 향해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백영민 기자 heelen@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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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주님만을~ 나의 마음, 몸, 당신께 드려요~♪"
12월 22일 서울 동소문동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센터. 성탄 파티를 열기 위해 모인 필리핀 이주 여성들이 성가 연습에 한창이다. 새 세상을 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미리암이주여성상담소(소장 노영재)가 매달 마련하는 `필리핀-한국인 부부`(필라코) 모임이다. 한데 모여 부르는 따갈로그어(필리핀 모국어) 성가에 고향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실려 코끝이 찡해진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행복하게 해주셔서….`
한국에 온 지 5년된 비라이씨 눈가도 촉촉해졌다. 살아온 시간을 회상하며 성가를 따라 부른다. 엄마 눈을 똑닮은 아이 셋이 아장아장 걸어다닌다. 이 중 둘은 쌍둥이다. 비라이씨가 성가 연습을 하는 동안 남편은 아이들 뒤꽁무니를 좇아다니느라 바쁘다.
비라이씨는 신앙심이 깊고 봉사정신이 강한 따뜻한 사람이다. 늘 이웃을 돌볼 줄 아는 그의 꿈은 수녀가 되는 것이었다. 결혼에는 마음이 없었다. 그는 남들 결혼할 나이에 마더 데레사 수녀가 설립한 `사랑의 선교 수녀회`에 입회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가정을 꾸려라.`
그러나 3년째 수녀원에서 살던 그는 기도하던 중 결혼성소를 발견했다. 엄마처럼 잘 챙겨주던 선배 수녀는 그를 축복하며 짐을 싸줬다.
"그 때 정말 가슴이 아팠지만, 하느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어요. 그리고 착한 사람 달라고 기도했어요."
2003년 봄. 그는 한 종교기관을 통해 지금의 남편을 소개받았다. 그는 당시 한국인 남편과 결혼해 고통받는 필리핀 이주여성의 실상을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모든 걸 하느님께 맡겼다. 그리고 면사포를 쓰기 전날까지 그는 "하느님 제가 이 사람과 결혼하는데 많이 도와주세요"하며 기도를 잊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은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 결혼 후 비라이씨는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매주 미사를 봉헌했고, 필라코 모임도 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하느님을 믿지 않는 남편이었지만 그는 아내의 종교를 존중해줬고, 아내가 행복을 느끼는 곳에는 항상 동행해줬다. 아내의 향수병을 달래주려 필리핀도 여러 번 다녀왔다. 지난 11월 이들은 미리암이주여성상담소에서 최초로 관면혼배를 받았다.
당시 부부는 많은 이들 속에서 축복을 받았고, 비라이씨는 남편이 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지금은 필라코 모임에서도 많은 부부들이 부러워하는 이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한국에 도착한 첫 해, 비라이씨는 이불 속에서 참 많이 울었다. 남편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서로 바라는대로 해주지 못했고, 낯선 한국문화는 그를 필리핀으로 가고 싶게 했다.
당시 필라코 모임과 미리암이주여성상담소는 많은 도움을 줬다. 모임에서 다른 부부들과 대화하며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작업을 해나갔고, 상담소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봉사자를 파견시켜 줬다. 봉사자는 한국어 뿐 아니라, 홀로 어려움을 겪는 비라이씨에게 친정엄마 같은 역할을 해줬다.
비라이씨는 요즘 영어학원에서 강사로 일한다. 지금은 그의 친정어머니가 함께 머물며 살림을 돕고 있다. 비라이씨는 아침에 일어나 남편 아침식사를 차려준 후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겨 놓고 학원으로 출근한다.
전기회사에 다니는 남편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을 데려온다. 초저녁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양손으로 잡고 집에 올 때 남편 유씨는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장모님이 심심하실까봐 호빵과 팝송이 담긴 CD를 사오기도 한다. 집안 살림을 돕는 건 일상이다.
비라이씨에게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 비결이 뭐냐고 묻자, 활짝 웃어 보이며 두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을 그린다.
"우리 사랑 가운데 계신 하느님이에요."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 셋과 비라이씨는 십자고상 앞에 나란히 앉아 저녁기도를 바친다. 기도를 잊으면 네 살배기 유진이가 "엄마 왜 기도 안해?"하고 묻는다.
남편은 기도하는 때에 함께 하지 않지만, 비라이씨는 믿는다. 언젠가 함께 나란히 앉아 성호를 그을 날을, 함께 감사기도를 바칠 날이 온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들 부부에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다문화 가정에 전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서로 참고 이해하는 것 밖에 없죠. 내가 잘못했을 땐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야 합니다."(남편)
"한국인 남편들은 아내를 많이 사랑해주세요. 어렵지만 같이 한국어 공부하고 한국 문화 잘 가르쳐 주세요. 그리고 시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는 아내를 더 아껴주세요. 그를 받아주세요. 이주여성이 아닌 `아내`로 받아들이세요. 그러면 사랑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아내)
이지혜 기자
bonaism
가톨릭평화신문 2009-0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