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7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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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작품 번역하는 그 기쁨 표현할 수 있을까

7년대부터 소설 시 시조 등 번역 … 한국문학 알리는 전령사 노릇 ''톡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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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오록(Kevin O`Rourke) 신부. 햇수로 한국 생활 46년째를 맞고 있는 골롬반외방선교회 사제이지만 일반인에게는 우리 문학을 외국에 알리는 번역가이자 외국인 최초의 국문학박사 교수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77년부터 30년 가까이 경희대에서 국문학을 가르치다 정년 퇴직한 경희대학교 명예교수다. 올해 만 칠순인 오록 신부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신현대아파트 자택에서 만났다.


"은퇴 이후 김삿갓(1807~1863) 시인의 시를 소개하는 작업을 해 그의 시 80편과 시 세계를 영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마무리지었지요. 출판사를 찾아야 하는데 쉽지가 않네요. 요즘에는 고려 고승 혜심(慧諶, 1178~1234) 스님의 시를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는 물음에 이같이 대답한 오록 신부는 "김삿갓 시 번역은 10년 전부터 시작한 작업"이라며 "김삿갓은 고대와 현대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량 역할을 한다"고 그를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국내에서는 김삿갓의 시 세계를 다룬 책이 한 권뿐일 정도로 김삿갓 연구가 소홀하다고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선교 사제로 파견된 오록 신부가 선교 일선이 아닌 대학에 몸을 담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 나는 아일랜드에 있을 때부터 학교에는 있지 않으려고 살살 피하곤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한국에 와서 평생을 교수로 살았으니 참 아이러니하지요."
 오록 신부가 털어놓은 사연은 이랬다. 오록 신부가 한국에 온 것은 사제수품 이듬해인 1964년 가을. 도착 다음날부터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등록해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오록 신부는 1965년 8월 춘천교구로 파견됐다. 소양로본당에서 1년 동안 사목한 후 한국어학당 과정을 마치고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당시에는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어요. 평소 문학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또 선교사로서 언어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깊이 의식하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한국에 살면서 한국말을 서투르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또 한국 문화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한국 문학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국문학과를 지원하게 된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었다. 1960년대에 많게는 150명이 넘는 골롬반회 선교사들이 한국에서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고 있었는데, 적어도 한 사람 정도는 한국에서 배우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신학과 철학을 배운 서양사람이 영문학도 아닌 국문학을 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부족했던 학부 학점까지 따야 했다.
 어렵사리 공부를 마치고 1970년 연세대에서 국문학 석사학위를 받고는 다시 춘천으로 파견됐다. 그리고 잠시 강원대에서 강의를 맡았다.
 "학교에서 가르치면서 본당 사목을 하려니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더구나 한국말로 강의를 준비해야 하는데 엄청난 부담이었지요. 힘들게 수업을 마치고 본당에 돌아오면 할머니 신자들이 레지오 마리애 훈화와 강복을 달라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탈진해 버릴 정도였어요. 두 가지 생활을 하기는 힘들겠다고 생각했지요."
 다시 서울로 돌아온 오록 신부는 마침 동료 선교사가 신수동성당을 짓고 있어서 그곳에서 함께 지내면서 국민대에 2년 정도 출강을 했다. 그러나 국민대에서는 아무리 해도 전임 강사 자리를 얻기가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잘 알고 지내던 조병화 시인(당시 경희대 문리대학장)에게 부탁을 해 경희대로 옮겼다.
 "그때가 1977년이었는데 그게 결국 30년 가까이 경희대에 몸담게 된 계기가 된 셈이지요."
 그는 경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등록, 1982년에 외국인으로서는 첫 국문학박사가 됐다.
 오록 신부는 다른 한편으로 70년대부터 우리 문학을 영어로 번역 소개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단편 소설집을 비롯해 조병화 시선집, 고시조 등을 번역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번역한 것도 이 시기였다. 이어 80년대 「한국 시 모음집」 90년 대 서정주 영역 시선집 「떠돌이의 시」 그리고 2001년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오록 신부가 영문으로 소개한 우리 문학은 책으로도 20권이 훨씬 넘는다.
 번역이 힘들지 않느냐는 물음에 오록 신부는 "기막히게 훌륭한 작품을 발견해서 번역하는 재미는 이루 표현할 수가 없다"는 말로 답변을 대신한다. 그러나 번역할 때에 조심해야 할 게 있다. 한글과 영어는 문장 리듬이 다르기 때문에 한글을 영어로 옮겨놓고 난 후에는 한글식 리듬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번역을 하고 나면 몇 개월을 내버려 두지요. 그런 다음에 영문으로 번역된 것을 봅니다. 그런데 영어문장이 영문 리듬을 타는 것이 아니라 국문 리듬을 타는 것을 발견하면 눈물을 흘리며 통탄하지요. 왜 이렇게밖에 번역하지 못했나 하고…."
 오록 신부의 번역작품에는 현대시뿐 아니라 시조와 한시 등 옛 시들이 많다. 김삿갓의 작품도 그러하고 요즘 붙잡고 있는 혜심 스님은 고려 인물이다. 오록 신부는 "국문학을 시작했을 때는 박두진, 서정주, 조병화 등 1900년대 시가 중심이었는데 갈수록 고대로 관심이 쏠리게 됐다"면서 "한국의 영혼을 보려면 현대가 아니라 고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저는 한국 문학의 혼은 20세기 시가 아니라 신라의 향가, 고려의 가요에 있다고 봐요. 그런데 요즘 향가나 고려 가요를 재미로라도 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대학 입시 준비 때문에 보지만 이후에는 죽는 날까지 한 권도 읽지 않아요. 그러면서도 `한국의 혼이…`하고 큰소리칩니다."
 어떻게 해서 사제의 길을 선택했고 또 한국에까지 오게 됐는지 물었다.
 "4형제 중에 막내였는데 50년대 아일랜드에서는 선택할 길이 많지 않았어요. 고등학교가 일종의 소신학교였지요. 신부님 교사가 20명이고 일반 교사는 3명에 불과했어요. 또 졸업생 40~50명 가운데 20명은 신학교에 갔고, 그중에서 30가 탈락하고 나면 10~15명은 신부가 됐습니다."
 오 신부는 신부가 될 바에야 교구 신부보다는 선교사제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골롬반외방선교회 신학교에 들어갔고, 1963년 12월 22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 `새사제학교` 같은 과정에 있던 이듬해 3월에 한국 파견 명령을 받았다.
 "동기 20명 가운데 필리핀에 12명, 로마에 1명, 남미에 1명이 파견됐고 한국에는 나를 포함해 6명이 파견됐습니다. 당시에 친구(선교사)들이 한국에 있어서 한국으로 파견된다는 소식에 크게 기뻐했어요. 이제 모험 가득한 세계가 펼쳐지는구나 싶었던 거지요."
 모험 가득한 세계에서 펼치고자 한 젊은 선교사의 꿈은 비록 일선 사목 현장에서 온몸으로 뛰는 선교사 생활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한국문학을 깊이 공부함으로써 한국문화와 소통하고 또 한국문학을 외국에 알려 이웃 문화와 소통하게 하는 문화의 소통자, 문화의 전령사로서 꽃을 피웠다.
 `시 정신은 아름다움에 대한 깨달음의 정신이고, 좋은 시는 깨달음을 의식하고 그 깨달음을 느끼게 하는 시`라는 오록 신부. 그러나 그는 시를 포함한 한국 문학이 더 좋은 작품이 되려면 추상적이고 일반론적인 것에서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옮겨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울러 문학에 있어서 언어의 절제, 표현의 절제도 강조했다.
 "영양가 없이 떠드는 소리가 없어야 합니다. 우리 문학 작품들에는 쓸데 없는 내용들이 많습니다. 위대한 작품들을 보면 그 작품에 기여하는 내용이 아니면 아낍니다."
 그게 어디 문학뿐일까. 우리 사회를 향해 또 교회를 향해 던지는 화두가 아닐까.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가톨릭평화신문  2009-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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