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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보는 김대건 생애] (1) 조선 최초 유학생

이역 만리 낯선 땅에서 6년 향수 달래며 기도로 마음 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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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을 맞아 김대건 성인의 삶과 영성을 되돌아보는 기획 연재`다시 보는 성 김대건 신부`를 5회에 걸쳐 마련한다.
 

 
▲ 마닐라 카모에스 공원에 있는 성 김대건 신부 동상.
동상은 1985년에 세워졌지만 공원은 김대건 성인이 마카오에서 유학할 때 이미 있었다.

"…나와 조선 포교지의 후계자들에게 순명과 복종을 약속합니까? 약속합니다. 나와 조선 포교지의 내 후계자들인 장상들에게…약속합니까? 약속합니다…."
 1836년 12월 2일 서울 후동(현 주교동)의 모방 신부 집. 세 소년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15살 같은 나이의 세 소년은 조선 천주교회 첫 신학생들로서 조선교회의 최고 장상에게 순명을 서약하는 중이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모방 신부는 조선 땅에 천주교 공동체가 생겨난 이후 반세기가 지나서 입국한 첫 서양 선교사였다.
 1836년 1월에 입국한 모방 신부는 목자 없이 어렵사리 신앙생활을 하는 조선천주교회에 가장 시급한 일이 사제를 양성하는 일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서울에 들어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2월 6일 첫 신학생으로 최양업(토마스)을 선발해 함께 살면서 가르쳤고, 3월 14일에는 최방제(프란치스코)를 신학생으로 선발했다. 약 4개월 후인 7월 11일에는 자신이 은이 공소에서 직접 세례를 준 김대건(안드레아)을 세 번째 신학생으로 뽑았다. 세 소년의 나이는 최양업과 김대건이 1821년 생으로 동갑이었으나 생일이 최양업이 조금 빨랐고, 최방제는 이들보다 한 살 정도 많은 듯했다.
 이들은 모방 신부 집에서 라틴어와 한문 등을 배우며 기초를 닦다가 본격적 신학 수업을 위해 멀리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기에 앞서 이날 신학생 선서를 한 것이다.
 이튿날인 12월 3일 세 신학생은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를로) 이광렬(요한) 등 교우 안내원들을 따라 의주 변문으로 향했다. 그해 12월 28일 중국쪽 국경인 봉황성 변문에 도착한 세 신학생은 조선 안내원들과 작별한 후 이제는 중국 안내원들을 따라 중국 대륙을 남하하기 시작, 6개월이 넘는 대장정을 거쳐 1837년 6월 7일 목적지인 마카오에 도착했다. 서울을 떠난 지 7개월 4일 만이었다. 오늘날 발달된 육로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5000㎞가 훨씬 넘는 길이었다.
 당시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는 극동무역의 전초기지일 뿐 아니라 유럽 선교사들의 극동 선교 거점 도시이기도 했다. 모방 신부가 이들 세 신학생을 마카오로 보낸 것은 이곳에 또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극동대표부 신부들은 직접 신학생들을 맡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극동대표부가 최초의 조선신학교가 된 것이다. 신부들, 특히 신학교 교장을 맡은 칼르리 신부의 눈에 세 신학생은 놀랄 만큼 순박할 뿐 아니라 신심과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더 바랄 나위가 없을 정도로 완전했다.
 그러나 7개월이 넘는 오랜 여행이 여독 탓일까, 아니면 조선과는 다른 기후와 생활 환경 탓일까. 세 신학생 가운데 최방제가 마카오 유학 생활 불과 6개월도 안 되는 1837년 11월 27일 위열병(胃熱病)으로 사망한다. 셋 가운데서 믿음이 더 강했고 신심이 더 깊어서 가장 기대했던 최방제의 죽음이었기에 신학교 신부들의 상실감은 컸다.
 칼르리 교장 신부는 제자의 죽음에서 조선교회에 대한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를 느꼈다. 그는 파리에 있는 뒤브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심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 뜻밖의 죽음이 우리 모두에게, 특히 나에게 준 깊은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브뤼기에르 주교는 비탄에 잠긴 조선포교지가 그의 첫 주교의 입국을 고대하고 있을 때 조선 국경에서 죽었습니다. 성직에 예정됐던 이 첫 조선인은 8개월간 계속된 위험을 극복하고 미구에 그의 조국의 사도가 되고자…빠르게 진행시키고 있을 때 돌연 사망했습니다. 하느님의 이 전능하신 뜻의 안배를 찬미합시다. 우리 인간의 생각대로 조선 포교지를 번영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빼앗아…`하느님 홀로 이 모든 일을 하셨다`고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게 하셨습니다. 그분의 영광이 더욱 드러나기를 고대합니다."
 조선교구 초대교구장으로 임명됐지만 임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네이멍구 마가자에서 병사한 브뤼기에르 주교와 조선교회 첫 신학생이었지만 사제의 꿈을 채 피우기도 전에 이역만리 마카오에서 병사한 최방제 두 사람의 죽음에서 인간의 뜻과 달리 안배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칼르리 신부는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동갑이자 맏이격인 친구를 잃은 두 신학생의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관련된 사료가 없어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함께 지내온 나날들을 떠올리면서 끓어오르는 슬픔을 피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료의 죽음은 또한 두 신학생에게 사제직을 향해 더욱 결연하게 각오를 다지는 계기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셋이서 지기로 한 과제를 이제 두 사람이 져야 한다는 사실에 무거운 책임과 사명의식을 느끼며 전율하지 않았을까.
 동료의 죽음을 가슴에 묻은 채 학업에 매진하던 두 신학생은 또 다른 시련을 겪어야 했다. 아편 거래 문제로 광동과 마카오 지역에 소요가 일어나 몸을 피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1839년 4월 6일 두 신학생은 신부들을 따라 마카오를 떠났고, 십여 일간 항해 끝에 마닐라에 도착했다. 마닐라 도미니코회 수도원에서 보름 정도 지낸 후 다시 마닐라 인근 도미니코 수도회가 운영하는 농장이 있는 롤롬보이로 옮겨갔다.
 비교적 건강한 최양업과는 달리 김대건은 자주 아팠다. 요통에 시달렸고, 두통과 복통, 가슴앓이까지도 잦았다. 신부들은 처음엔 김대건의 통증을 성장통 정도로 여겼다. 그러나 통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늘 요통과 복통과 두통을 달고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얼굴 빛도 좋지 않았고 머리카락도 보기에 흉했다. 때로는 판단조차 잘 못하는 경우도 보였다.
 신부들은 자연히 최양업과 김대건을 비교하게 됐다. 하느님께서 지금처럼 계속 건강을 허락해 주신다면 최양업은 분명히 조선교회를 위해 유익한 몫을 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김대건에 대해서는 난감해 하곤 했다.
 두 신학생 역시 신부들의 이런 생각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럴 경우 한쪽은 의기소침해지고 약해지기 쉽다. 어쩌면 김대건이 그러했을지 모른다. 그럴 때면 그는 때로는 기도로 어려움을 이겨냈을 것이며 때로는 고향의 부모와 형제 친척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기도 했을 것이다. 골배마실과 은이공소에서 지냈던 지난 시절을 떠올리며 향수를 달래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



가톨릭평화신문  201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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