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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의거의 현장, 하얼빈역을 가다

안중근 애국의 날 / 암호같은 표시와 씁쓸함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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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얼빈역 현재 모습.
 


 
▲ 1909년 당시 하얼빈역 모습.
 
2월 23일 오후 4시30분경. 특별취재팀은 고려회관 장영철 관장의 안내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역사의 현장인 하얼빈역을 찾았다. 앞 사람 머리만을 보며 걷기를 5분. 오가는 인파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복잡한 역사를 통과해 제1플랫폼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100년 전 ‘그날의 현장’에 섰다. 그러나 눈 씻고 찾아봐도 역 주변에 안중근 의사의 동상은커녕 관련 안내판 하나 찾아 볼 수 없었다. 중국 정부가 일본과의 외교 마찰을 우려해 안내판 설치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역사의 현장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고요하고 평범한 장소였다.

바닥의 새로 깔린 보도블록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주변과 구별되는 갈색 타일이 표시돼 있었다. 타일 안쪽은 ‘세모’ 모양의 표시가 돼 있다. 바로 안중근 의사가 저격을 한 지점이다. 이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두 칸, 앞으로 세 칸 떨어진 곳에 같은 형식의 ‘네모’ 표시가 있다. 저격 지점으로부터 5m 남짓 떨어진 이 자리는 이토 히로부미가 총탄을 맞고 쓰러진 곳이다. 이토가 쓰러진 ‘네모’ 자리에는 일본인들이 그의 흉상을 세웠다가, 훗날 중국 정부에 의해 철거당했다.

마치 암호 같았다. 이 작은 표시 두 개가 이곳이 역사의 현장이었음 알려주는 유일한 단서인 셈이다. 표지석 하나 없는 ‘의거의 현장’은 무심한 중국인들에게 있어 그저 평범한 승강장일 뿐이었다. 그나마 ‘세모’와 ‘네모’ 표시도 2006년에 설치된 것이다.

씁쓸한 마음을 뒤로 한 채 서둘러 취재를 마쳤다. 플랫폼을 나서는 찰나 흐렸던 구름 사이로 한 줄기 햇살이 내비쳤다. 그 햇살 사이로 그날의 총성이 메아리처럼 들리는 듯했다.



 
▲ 특별취재팀이 1909년 10월 의거 당시를 재연하고 있다. 바닥에는 안중근이 저격하던 자리(아래사진 오른쪽)와 히로부미가 쓰러졌던 곳(왼쪽)에 다른 블록과 구별되는 표시가 있어, 이 곳이 역사의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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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09-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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