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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 베네딕도수도원 휴게실은 숭공학교 학생들이 제작한 한국 전통 양식 가구들로 채워졌다.
이 아름다운 가구 속에서 독일 출신 수도자들은 기도와 노동 속에서 `쉼`을 얻었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수도자들 모습이 여유로워 보인다.
촬영 시기는 확인할 길이 없다.
▲ 사냥을 하러 나온 성 베네딕도회 선교사 3명이 지게를 진 한국 소년 2명과 사진을 찍고 있다.
나무 하나 없는 민둥산을 배경으로 사냥용 엽총을 손에 든 선교사와 여타 선교사들이 왼쪽과 뒤쪽에 앉아 있고, 한복 차림에 머리수건을 쓴 한국 소년들이 카메라가 신기한 듯 지켜보고 있다.
정확한 촬영 시기는 알 수 없다.
▲ 1921년 5월 26일 성체성혈대축일을 맞아 서울 성 베네딕도수도원에서 거행된 성체 거동 행사에서 원산대목구장 보니파시오 사우어 주교아빠스가 성체강복을 하고 있다.
서울 수도원은 설립 초부터 아름다운 전례로 신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는데, 이는 오틸리엔연합회 선교사들이 일찍부터 전례를 중시하는 베네딕도회 특성이 선교에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성 베네딕도회 서울 수도원 성당 내부.
서울 백동수도원에 연결돼 1911년 7월에 지어진 이 성당은 백동 지역 신자들을 위해 하루 종일 개방됐다.
▲ 1913년 6월 8일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서 아빠스로 축복된 뒤 그해 12월 초 한국으로 돌아온 보니파시오 사우어(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 아빠스와 수도 공동체가 한자리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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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라, 아들아. 스승의 계명을 경청하고 네 마음의 귀를 기울이며 어진 아버지의 훈시를 기꺼이 받아들여 보람 있게 채움으로써 불순종의 나태로 물러갔던 그분께 순종의 노고로 되돌아가거라.`(「베네딕토 규칙서(Regula Benedicti, RB)」 머리말 1~2)
`하느님을 찾음`(Querere Deum, RB 58,7).
성 베네딕도회 수도생활의 기본 골격은 이 짧은 한 마디에 다 담겨 있다. 정주(定住, RB 58,17)와 함께 이뤄지는 공동생활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 삶`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영적 여정이다.
1909년 12월 13일, 원장좌 수도원으로 승격된 서울 성 베네딕도 수도원 또한 교육사업을 위해 한국에 파견됐지만, 공동 전례기도(Opus Dei)와 거룩한 독서(Lectio Divina), 손노동(Labor Manum)이라는 수도생활의 근본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보니파시오 사우어 원장신부 또한 극동 최초 성 베네딕도회 파견지인 한국에 `수도회 생활`을 소개하는 것을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다. 사우어 원장신부는 서울 수도원을 자신이 살았던 독일 풀다(Fulda) 수도원처럼 한국 종교생활과 그리스도교 문화의 중심지로 삼으려 했다.
일단 원장좌 자립수도원으로 승격됨에 따라 서울 수도원은 수련자를 받을 수 있게 됐고 그해 12월 11일 교황청 수도회성으로부터 관면을 받아 시간전례(성무일도)를 시작했다. 시간전례를 하려면 원래 수사신부 8명이 요구됐지만(옛 교회법 규정, 현재는 종신서원자 12명 필요), 서울 수도원은 수사신부 3명과 수사 4명으로 시간전례를 시작했다.
기도와 더불어 `손 노동`도 시작됐다. 수도자들은 한국어를 익히면서 서울 변두리 동소문 근처 백동(현 혜화동) 낙산 아래 9만9173.6㎡(3만 평) 규모 대지에 수도원을 신축하고 농사를 지었고 빵굽기와 취사를 직접 해결했다.
1909년 12월과 1911년 초 두 차례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서 수도형제들이 파견됨으로써 서울 수도원 식구는 14명에 이르렀고, 이들이 경리와 농장, 축산 소임을 각각 맡아 수도원으로서 틀을 갖췄다. 회원이 증가하자 1911년 봄 수도원 증축공사에 들어가 그해 7월에는 성당을, 9월엔 성당과 연결되는 3층 규모 새 수도원을 완공시켜 외적으로도 수도원의 면모를 갖췄다.
이같은 노력으로 1913년 5월
가톨릭평화신문 2009-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