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서울에 올라온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미사에 참례했다. 그 일로 거의 매일 성당에 나갔다. 미사에 나오는 신자는 4~5명, 많아야 20~30명이었다. 우린 금방 친해졌고 자연스레 미사는 빼놓을 수 없는 내 하루 일과였다.
드디어 성령이 내게 내려오시어 감히 상상도 할수 없었던 세상을 보고 맛 보게 해 주시어 그 길로 난 신부가 되었고 어언 3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때 그 신부님의 존함은 민후고 아일랜드 신부님이시다. 우리 한국 신부님들 사이엔 그런 사이 신부를 `아들 신부`, `아버지 신부`하며 서로를 많이 챙겨 주는데 여태껏 나는 몇 번 찾아 뵈었을 뿐 아무런 보답도 못하고 산다.
지금까지도 기회만 생기면 안부를 묻고 궁금해 하지만 얼마 전 본국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 말고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언젠가는 신부님을 뵈러 아일랜드를 다녀와야지…. 하지만 마음뿐이다.
사실 그 분은 나에게 특별히 잘해주신 것도 없고, 특별한 가르침을 준 것도 없다. 다만 나 같은 가난하고 지저분한 무지랭이 촌놈이나 교수, 대사, 부자 집 아들이나 딸들을 차별없이 똑같이 예뻐해 주셨다. 그리고 내가 신학교에 가기로 결심하고 "신부님 저같은 놈도 신부가 될수 있어요" 하고 물었을 때 "그러믄요. 베드로도 어부였어요" 하시며 기쁘게 추천해 주신 일 말고는 별 특별한 인연도 없다.
그러나 지금와서 생각해 본다. 그때 그 신부님의 자리에 내가 있었더라면 나 같은 놈을 추천해 신학교에 보냈을까? 당연히 `아니오`다. 그분이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그 가난, 그 온유함, 그 순수함, 그 넓고 깊은 존재의 사제였기에 가능했음이 분명하다.
그 후 신학생이 되어 여름방학 때 한 동료 신학생 본당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동료가 자기 본당 사제관에 날 데려가 그 본당 신부에게 소개시켜 줬다. 그 사제관에 들어서는 순간 난 그냥 얼어붙었다. 으리으리한 사제관, 시끄럽게 짖어대는 애완견 소리, 차는커녕 물 한잔 내밀지 않는 쌀쌀한 식복사, 그리고 웬 보잘것 없는 아이가 왔느냐는 듯 마지못해 인사받는 본당 신부님 태도…. 아마, 아니 그런 부유하고 거만한 신부 밑에 내가 있었더라면 지금 나는 결코 이곳에서 이렇게 사제로 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 권이복 신부 |
공경하올 민후고 신부님, 이제 저도 사제가 된 지 어언 31년입니다. 항상 민 신부님을 기억하며 가난하고 온유하며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는 사제로 살아보고자 제 딴에는 열심히 노력하고 있어요. 끝까지 절 지켜 봐 주세요.
신부님! 감사합니다.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