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7일
기획특집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세상에 빛을⑨] 덕원수도원③ ''가톨릭 문화 중심지'' 된 덕원

수도생활 주축으로 교육ㆍ출판ㆍ의료ㆍ농공활동 총 망라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 덕원 수도원 영농활동은 수도원 자급자족뿐 아니라 이웃한 한국 농부들에 대한 영농 기술 전수를 통해 나눔이라는 의미가 함축돼 있었다.
1949년에 작성된 덕원수도원 일람표에 따르면, 임야 100ha(30만3000여 평)에 밭 15ha(4만5450여 평), 논 7ha(2만1210여 평)가 수도원의 소유였고, 덕원신학교는 논 4ha(1만2120여 평)에 밭 3ha(9090여 평)를 소유했다.
그리고 근방 10개 마을에 덕원신학교 소유 소작지가 있었다.
이는 덕원수도원 및 신학교를 유지하는데 충분한 재정적 바탕이 됐다.
 

 
▲ 1928년 일제 당국 인가를 얻어 외과 및 내과 진료를 할 수 있는 의원이 덕원수도원 안에 설립됐다.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 병원장의 추천으로 요셉 그라하머 수사는 일단 3년간 의사실습을 할 수 있는 면허를 교부받았고, 나중에 경성제대 병원 외과의 배려로 서울에서 임상 경험을 쌓아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1929년 여름에 진찰실 2개에 대기실과 약국으로 이뤄진 작은 진료소가 완공됐고, 1933년과 1934년에 진료소를 증축해 확장했으나 의원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1934년 1년간 의료봉사 결실을 보면, 진료를 받은 환자 수는 2만1065명에 이르렀고, 약품을 제공받은 이는 2만7210명에 달했다.
사진은 덕원수도원에 있던 덕원의원 전경이다.
 


 
▲ 덕원수도원에서 재봉실 책임자였던 요아킴 바우어 수사가 견습생들과 함께 옷을 짓고 있다.
재봉실에서는 수도복과 주교 및 사제들 수단, 복사복, 잠옷, 바지, 외투 등 각종 복식과 커튼, 모자 등을 만들었고, 심지어는 본당에서 쓰이는 깃발도 제작했다.
 


 
▲ 덕원수도원 인쇄소에서 강 세바스티아노 수사와 루도비코 피셔 수사가 한국인 직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1929년 중소 간 국경분쟁이 벌어지면서 만주 동북부 의란포교지에서 본당 건축을 하던 일데폰스 플뢰칭거 수사가 덕원으로 돌아와 1929년 성탄대축일을 앞두고 수공으로 교회 광고지를 인쇄한 것이 덕원 인쇄소의 시초다.
이어 인쇄기가 들어왔고 피셔 수사가 식자에서 인쇄, 제본까지 맡아 많은 서적을 간행했다.
덕원 인쇄소는 1938년 한 해 동안 「천주교 교리문답」(1만5000부), 「노인용 문답」(1500부), 「십이단(열두 가지 주요 기도문을 모은 책)」(2000부), 「미사경본」(400부), 「아해(어린이)들의 미사ㆍ고해ㆍ성체 안내」(2000부) 등을 간행했다.
1939년 연길 수도원에 인쇄소가 세워지기 전까지 원산대목구와 연길지목구의 모든 서적이 이곳에서 간행돼 베네딕도회의 자랑거리가 됐다.
 


   한적한 시골이던 덕원은 수도원 건설로 `가톨릭 문화의 핵`으로 떠오른다. `수도생활`을 주축으로 교육과 출판ㆍ인쇄 사업, 의료 봉사, 농공 활동 등을 통해서였다.

 교회 전례 기도나 시간전례(성무일도) 또한 선교로 보는 베네딕도회는 기도를 통해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적, 내적 여정으로서 수도생활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을 찾는 삶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 여정에서 관상생활(vita contem-plativa, 기도ㆍ묵상ㆍ렉시오 디비나)과 수행생활(vita pratica, 금욕과 같은 내적 투쟁)이 이뤄졌다. 교육과 출판ㆍ인쇄, 의료, 농공 활동에는 이미 이같은 수도생활이 녹아들어



가톨릭평화신문  2009-08-16

관련뉴스

말씀사탕2025. 10. 7

시편 89장 2절
저는 주님의 자애를 영원히 노래 하오리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