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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 함께한 민 요셉(왼쪽) 신부와 김한기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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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초등학생 시절 복사를 하면서 사제의 꿈을 갖게 됐다. 이 꿈을 갖게 해주신 분이 당시 강원도 삼척 성내동본당 보좌신부로 오셨던 파란 눈의 젊은 사제, 민 요셉 신부님이다. 아일랜드 태생의 성 골롬반회 선교사로 1958년 사제품을 받자마자 이듬해인 1959년 한국 땅을 밟아 춘천교구 죽림동ㆍ소양로본당 보좌를 거쳐 성내동본당에 부임하셨다.
성격이 불 같은 신부님은 우리가 잘못해서 화가 나실 때는 필자와 동료 복사들을 꼼짝 못하게 하셨지만 금방 마음이 풀어지셔서 어린 우리를 그렇게 다정하게 대해주실 수 없었다. 복사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자주 파티를 열어주고, 환등기로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서 선교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맛있는 과자를 주셨다. 그렇게 복사들과 친하게 지냄으로써 "나도 언젠가는 민 신부님과 같은 사제가 되면 좋겠다"는 꿈을 갖게 해주셨다. 성내동본당을 떠나셨다가 몇 년 후 다시 주임으로 오신 신부님은 1971년 한국 땅을 떠나셨다.
필자는 신부님이 한국을 떠난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신부님을 다시 극적으로 만난 것은 교포사목으로 미국에 있던 중 휴가차 아일랜드의 성 골롬반회 본부를 방문했을 때였다. 신부님은 당시 미국 로드 아일랜드 브리스톨에 있는 원로사목자 사제관에서 일하시던 중 휴가차 아일랜드에 와 계셨던 것이다. 신부님이 필자를 알아보고 "오, 우리 시몬!" 하고 반갑게 맞아주셨을 때는 마치 친아버지를 만난 듯 반갑고 기뻤다. 신부님과 헤어진 지 30년이 지나 사제가 되어 처음으로 신부님을 만난 것이다.
2004년 8월 미주 평화신문 주선으로 신부님을 초청하게 돼 신부님과의 재상봉이 이뤄졌다. 33년 만에 한국 땅을 다시 찾은 신부님은 그동안 사목하셨던 춘천교구와 원주교구의 본당들을 방문해 주교님과 신부님들, 그리고 신자들을 만나셨다. 신부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 같아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다. 신부님은 미국으로 귀화해 브리스톨의 원로사목자 사제관에서 경리 일을 맡아보고 계셨다. 그런 가운데서도 인근 프라비던스의 한국인공동체를 맡아 매주 한국어 미사를 집전하고 계셨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말을 잊지 않고 유창하게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신부님은 필자에게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 도움을 청하면서 인내롭게 사제생활에 충실해야 한다"며 많은 충고를 해주셨다. 다 낡은 배낭에 운동화 차림의 신부님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셨다.
이런 민 신부님이 너무나 보고 싶어 이듬해인 2005년 민 신부님이 계신 로드 아일랜드를 방문한 필자는 민 신부님의 삶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에 잠시 머무르는 동안 하루는 신부님을 따라서 두 시간 가량 멀리 떨어진 장애인공동체에 미사를 드리러 갔는데, 신부님은 장애인들에게 사랑과 정성을 다하셨다. 또 힘든 상황에 처한 가족을 찾아 면담하시고, 한인공동체를 위해 애쓰시는 등 동분서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신부님 말씀이 자신은 결코 은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사제로서 직분을 끝까지 충실하게 수행하시는 신부님 모습에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민 요셉 신부님, 저도 신부님을 본받아 제게 맡겨진 양들을 잘 돌보고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사제직에 충실코자 합니다. 부족한 제가 신부님의 뒤를 따르는 착한 목자가 될 수 있게 이끌어주소서. 다음 기회에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