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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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주최 제3차 한국순교자 시복시성을 위한 세미나

한국천주교 창설주역 가운데 권일신, 권철신, 이승훈에 대한 순교 사실과 그 평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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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의 신앙과 공적 등에 대한 새롭고 폭넓은 시각 필요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회가 주최한 제3차 한국순교자 시복시성을 위한 세미나가 19일 정자동주교좌성당에서 `한국천주교회 창설주역 가운데 권일신ㆍ권철신ㆍ이승훈에 대한 순교사실과 그 평판에 관하여`를 주제로 열렸다.
 
 발제자과 논평자들은 세 사람에 대한 신앙과 순교평판에 대해 폭넓게 논의했다. 순교ㆍ배교 여부에 관심을 집중하기보다는 그들의 신앙에 대해 좀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심상태 몬시뇰 등 6명의 사제ㆍ학자가 발제를, 여진천(배론성지 주임)ㆍ장동하(가톨릭대학교)ㆍ배달하(원주교구 대하본당 주임)ㆍ김성태(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신부, 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박사, 조광(고려대) 교수가 논평을 담당했다. 다음은 발제문과 논평 요약이다.
 

 
▲ 한국순교자 시복시성을 위한 세미나 종합토론에서 최인각 신부가 발표하고 있다.
 
 ▨이승훈 베드로의 교회 활동과 신앙고백 -순교 여부와 관련하여
                                         
                                         원재연 박사(수원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한국 교회사 연구에서 이승훈(베드로)은 교회창립의 원공(原功)과 신앙부인의 원죄(原罪)를 동시에 덮어쓴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이승훈이 1785년, 1791년 두 차례 공개적으로 배교를 선언했지만 일시적인 박해 위협에서 벗어나려는 `거짓 배교 선언`에 불과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승훈이 신앙 때문에 죽었으나 배교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평가와 달리 박해자와 척사론자들은 그가 "스스로 그리스도교 신앙 때문에 죽는다"는 사실을 외형적으로 입증해주는 결안(結案)을 남겼다고 말한다. 그의 후손은 유시(遺詩)를 구전으로 전하며 순교사실을 확신했다.

 이승훈은 조선교회 창설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던 수많은 천주교 서적들을 가져와서 교리를 보급하고 신앙공동체를 확산시킨 `원죄` 때문에 박해자들의 칼날을 피해 살아날 가능성이 없었고 어떤 변명을 해도 박해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배교자로 죽음을 맞이했다고 단죄하는 것은 성급하고 안이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천주교 수용과 전파의 토대를 구축한 권철신과 권일신
          
                      
서종태 박사(호남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권철신은 천주교를 수용하는 데 필요한 사상적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천주교의 수용 및 전파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천주교를 전파할 때 천주교를 수용해 한국 교회를 창설하고 지방 각지에 신앙공동체 설립을 주도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권철신의 제자이거나 그의 학문적 영향을 받은 이들이었다.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은 1784년 겨울에 입교, 그의 가족들에게 천주교를 믿도록 권유했다. 이후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흔들림 없이 교회에 남아 교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슬기롭게 난국을 헤쳐 나갔다.
 
 1785년 추조적발사건과 1791년 제사를 금지하는 구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으로 이벽과 이승훈이 교회를 멀리할 때도 흔들림 없이 교회에 남았다. 권일신은 천주교가 널리 전파되고 안정적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한 공로가 크다.
 
▨사료를 통한 권철신ㆍ권일신의 생애와 신앙에 대한 재구성

                                                     박광용 교수(가톨릭대학교)
 
 권일신은 조상제사 문제 발생 이후, 반대파들에 의해 `교주`라고 고발될 당시까지도 사대부로서 거의 유일하게 남았던 초기 교회 지도자로서, 당시 교회의 기둥이었다는 평판은 사실로 인정된다. 그가 작성한 회오문(悔悟文)으로는 진정한 배교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니 그의 심복제자들이 이후 교회의 기둥으로서 성직자 영입을 달성했다는 사실들을 더 적극적으로 평가해야할 것이다.
 
 권철신의 경우 저명한 서학 교우라는 사실을 죽을 때까지 적극 벗어버리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권철신은 네 번째 문초에서 윤유일의 북경 왕래 및 주문모 신부 영입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관에 고하지 않았다는 지정불고를 인정하고 받아들였고 2차 심문 후에는 노령과 지병으로 형이 정지됐지만 그 당일에는 심문하는 장의 한도인 30도를 맞고 나흘 뒤에 후유증으로 죽음에 이르렀다. 이는 곧 `주재자에 대한 올바를 흠숭` 문제인 성직자 영입 문제에서 자신의 죽을 자리를 찾았다는 의미로서, 그 이전 언사에 관계없이 이 자세가



가톨릭평화신문  2009-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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