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60만 개 판매, 독성 실험 은폐 정체불명 폐 질환자 증가, 피해자 2330여 명, 사망자 464명
 |
▲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오른쪽)이 지난 5월 영국 옥시레킷벤키저 본사 앞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를 알리고,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항의 시위를 하고 있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제공 |
최근 가습기 살균제 피해 문제가 대두하면서 한국 보건구조와 인식, 기업 윤리관이 흔들리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가습기 살균제’가 처음 유통된 것은 1994년. 유공(현 SK케미칼)이 처음 시판했다. 이어 애경과 이마트(1997년), 옥시(1998), 옥시레킷벤키저(2001) 등 2011년까지 17년간 기업 10여 곳에서 20여 개 제품이 쏟아져 나왔다.
건조한 겨울철, 새집 증후군 등으로 가습기 사용이 늘자 세균 번식을 막고 소독해 쓰자고 나온 게 가습기 살균제다. ‘살균 99.9’, ‘천연 성분’, ‘인체 무해’ 등 온갖 좋은 문구로 소비자들을 현혹한 기업들은 가습기 살균제를 연간 60만 개 팔았다.
방관한 정부, 사실 은폐한 기업
이후 2000년대 들어 정체불명의 폐 질환 환자가 증가하기 시작, 2011년에는 폐 질환 환자가 전국에 걸쳐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정부 당국은 뒤늦게 역학조사에 착수했고, 가습기 살균제가 ‘화학 살인 도구’였음을 규명하게 된다. 5년이 지난 후인 지금에야 사태 심각성이 드러난 것은 당시 정부의 지지부진한 조사 태도와 사실을 은폐하려는 기업의 어두운 기업 윤리의식 때문이었다.
가습기 살균제 허가는 한국이 유일
가습기 살균제에 포함된 유해 물질은 이름도 생소한 PHMG(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 PGH(염화올리고에톡시에틸구아니딘), CMIT(메칠클로로이소치아졸리논) 등이다. 하나같이 독성이 강한 화학 성분들이다. 가장 많은 판매량을 올린 옥시레킷벤키저를 비롯한 기업들은 이 물질의 독성 실험을 빠뜨리거나 결과를 속였고, 정부는 제품의 흡입 유해성 검증에 대해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가습기 살균제가 허가돼 출시된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
부도덕한 기업 살인행위
지금까지 정부와 환경 단체 등이 신고받은 피해자 수는 2330여 명. 이 가운데 5월 31일까지 가습기 살균제로 사망한 사람은 464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피해 접수 현황으로만 보면 사망률이 20에 이른다.
태아와 산모 등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피해자, 6세 때부터 폐섬유화증 진단을 받아 목에 직접 관을 삽입해 산소호흡을 하게 된 쌍둥이, 일가족 모두가 폐 질환으로 수술을 받거나 정신적 피해를 당한 가족 등 고통과 후유증을 겪는 이들이 상당하다. 그러나 이는 신고된 숫자에 불과해 피해자 규모는 더 클 것으로 보인다. 검찰은 현재 이와 관련한 수사를 진행 중이며,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를 ‘부도덕한 기업의 살인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2011년부터 가습기 살균제 피해 진상규명을 촉구해온 최예용(프란치스코)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이는 돈 벌자고 가습기 살균 제품을 내세워 사람들을 죽인 명백한 살인행위”라며 “검찰 수사팀이 관계자들을 구속하고 조사하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여전히 정확한 피해자 규모와 책임 소재, 보상에 대한 향방은 미지수”라고 우려했다.
최 소장은 “드러난 피해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대형 다국적 기업들의 횡포를 국제 사회에도 알려야 한다”며 “교회 내에서도 각 교구 주보와 환경사목 담당 부처를 통해 피해자 신청을 받고 이를 알리는 데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체 국민의 보건과 건강을 위해 정부가 소 잃은 외양간이라도 제대로 고쳐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박도명(황석두 루카)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보상과 사태 극복을 넘어 유해성 물질 관리에 관한 올바른 법률 제정과 도입, 피해자들을 위한 사회 공동체적 치유와 인식 마련, 유해 물질 검증과 규제가 강화돼야 한다”며 “우리 사회 환경ㆍ보건 인식이 제고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정훈 기자 sjunder@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