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본당에서 실시하는 제주도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여러 성지 중에 추자도가 많이 생각났다. 신유박해 때 황사영의 백서 사건으로 그의 부인 정난주가 제주도로 관비가 되어 유배 가는 길에 갓난아기였던 핏덩이 황경한을 추자도 바위에 놓고 떠났다. 우리 순례 일행은 그의 묘소 앞에 모여 기도하며, 그 날 모자간의 헤어짐과 평생의 그리움을 헤아려보았다. 신앙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부부간, 부모와 자녀 간의 혈육을 갈라놓을 수 있었단 말인가?
사실 우리나라는 어디를 가든 순교자의 피를 흘리지 않은 곳이 없다. 그만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순교자들이 수없이 많다. 그런 순교자들을 기리고 후대 신앙인들이 그분들의 정신을 이어받으며, ‘순교의 현재화’를 꾀하기 위해 전국적인 기도의 정성으로 우리는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를 모시고 있다.
순교자들의 피로 성장한 한국교회이지만 과연 우리는 그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분들은 피로써 신앙을 지켰지만 삶의 과정 속에 신앙을 어떻게 실천했는지는 알고 있는가? 우리는 순교자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그분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 이것이 바로 현대 신앙인들이 과거 순교자들과의 괴리감을 느끼는 이유이다. ‘적색순교’를 할 필요가 없는 현대 신앙인들은 ‘백색순교’를 위해 과거 순교자들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들이 삶 안에서 실천한 신앙은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 가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좁게 보면 한국 순교자들은 가톨릭교회에서만 기리는 분들이지만, 넓은 안목에서는 모든 인류가 지녀야 할 공통된 가치관, 사랑, 우정, 신뢰, 나눔, 용서 등을 보여준 분들이라는 점에서 신앙을 가지지 않는 사람들도 매우 공감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의 스토리를 문화 콘텐츠화 해야 한다. 문화 콘텐츠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책, 음악, 연극, 뮤지컬, 영화 등 다양한 콘텐츠로 재활용하면서 수용자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의미화 시키는 역할을 한다. 순교자들의 삶과 신앙 역시 문화 콘텐츠화 할 때 신자들뿐 아니라 비신자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간접 선교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작년에 ‘순교자의 딸 유섬이’라는 뮤지컬을 본 적이 있다. 마산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으로 준비됐는데, 백 마디 말보다 그 뮤지컬을 한 번 보고 나서 참 많은 것을 느꼈다. 어느 원문에 단 한 줄밖에 되지 않는 내용이 작가의 상상력에 힘입어 뮤지컬로 탄생하고 순교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일깨워주었다. 순교자 유항검의 어린 딸 유섬이가 거제도로 유배를 가서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하는데, 정조를 지키기 위해 완전히 외부와 차단된 흙돌집에 살면서 신앙생활을 철저히 지키는 고결한 삶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순교에 관한 문화 콘텐츠는 수용자들에게 인간답게 사는 길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교회의에서 발행한 성지순례 안내 책자에는 111곳이 간단히 소개돼 있고, 이곳을 모두 순례해 스탬프를 받은 사람은 주교회의 ‘순교자현양과 성지순례사목 위원회’ 위원장 주교님에게 축복장을 받는다. 참 좋은 프로그램이다. 이 모든 성지를 순례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회개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성지들을 보면 땅을 넓히고 건물을 짓는 하드웨어적인 면에서는 잘 되어 있지만, 정작 순례객들이 방문했을 때 그 성지가 어떠한 곳인지,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 등의 소프트웨어적인 정보와 안내가 너무 부족하다. 다시 말해서, 순례객들이 단순히 관람객이나 스탬프 받는 자가 되지 않고 스스로 주체적으로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찾고 자기 삶에 순교를 현재화할 수 있도록 성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체험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를 개발해야 한다. 교회가 순교자들의 피를 헛되이 하지 않고 질적 복음화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있다면 그들을 단순한 피의 순교자로만 제한하지 말고, 그분들의 삶과 신앙이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들에게 유효할 수 있도록 새로운 교회문화의 생성이라는 면에서 다양한 문화 콘텐츠 작업을 위해 인력과 재정의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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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수 신부 (서울 청담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