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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 2019년 제3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교황 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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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제3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2019년 11월 17일, 연중 제33주일)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

 

 

1. “가련한 이들의 희망은 영원토록 헛되지 않으리라”(시편 9,19). 이 시편 말씀은 지금도 놀라울 정도로 시의적절합니다. 신앙이 특히 가난한 이들의 마음에 아로새겨져 불의와 고통과 불안한 삶 앞에서 잃어버린 희망을 되찾아 줄 수 있다는 심오한 진리를, 이 말씀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저자는 가난한 이의 처지와 가난한 이를 억압하는 이의 교만을 이야기합니다(시편 10,1-10[9,22-31] 참조). 그는 불의를 극복하고 정의를 되살리고자 하느님의 심판을 간구합니다(10,14-15[9,35-39] 참조). 이 시편 말씀 안에 담긴 몇 가지 물음들이 수 세기를 거쳐 우리 시대에까지 울려 퍼지는 듯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찌 이러한 불평등을 용납하실 수 있는 것입니까? 가난한 이가 굴욕을 당할 때에 도움은커녕 어찌 그냥 내버려 두실 수 있으십니까? 특히 가난한 이의 고통 앞에서, 억압자들이 그 악행으로 단죄받기는커녕 더 풍족한 삶을 누리는 것을 어찌 내버려 두십니까?

 

이 시편이 저술된 때는 큰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흔히 그러하듯 이러한 경제 발전은 심각한 사회 불균형으로 이어지고,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수많은 빈곤층을 낳았습니다. 그래서 빈곤한 이들의 상황은 소수 특권층이 누리는 부에 비하여 더욱더 비극적이었습니다. 시편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직접 겪었기에 참으로 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는, 교만하고 불경한 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괴롭히며 그들의 얼마 안 되는 재산마저도 갈취하고 노예로 삼기까지 하던 시대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경제 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부를 축적해 왔습니다. 최소한의 생활필수품도 없고 때로는 멸시와 착취에 시달리는 가난한 이들을 우리가 날마다 도시의 거리 곳곳에서 마주치고 있는 이때에, 이러한 부의 축적은 더욱더 부조리하게 보입니다. 요한 묵시록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묵시 3,17). 수 세기가 흘러도 역사가 우리에게 아무런 교훈도 남겨 주지 않은 것마냥, 빈부의 상황은 변함없이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시편 말씀은 그저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에도 해당됩니다. 우리의 현재는 하느님 심판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2. 오늘날에도 우리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 젊은이와 어린이를 예속하는 수많은 형태의 새로운 노예화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러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다른 곳에서 생계 수단을 찾으려고 고향 땅을 떠날 수밖에 없는 가정들, 무자비한 착취 탓에 부모를 여의었거나 강제로 부모와 생이별하게 된 고아들, 직업적 성취를 이루려 하지만 근시안적 경제 정책 탓에 일자리 없이 방황하는 젊은이들, 매매춘에서 불법 마약 거래에 이르기까지 깊은 모멸감을 안겨 주는 온갖 폭력의 피해자들을 날마다 마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은폐된 수많은 사리사욕의 희생양으로 전락해 버리고, 정치적으로 빈번히 이용당하며, 연대와 평등마저도 부인되는 수백만 이민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도시의 거리를 떠도는 수많은 노숙자들소외된 이들도 어찌 잊겠습니까?

남들이 쓰다 남아서 버린 것들 가운데에서 요깃거리나 옷가지를 찾으려고 쓰레기더미를 뒤지는 가난한 이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볼 수 있습니까! 가난한 이들 자신이 인간이 버린 쓰레기더미의 일부가 되어 버리고, 쓰레기 취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치욕에 공모한 이들은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흔히 사회의 기생충으로 낙인찍혀, 그들의 가난조차 용서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낙인은 늘 따라다닙니다.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위협적인 존재로 또는 그냥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해도, 가난한 이들은 스스로 위축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이 극심한 가난의 굴레는 벗어날 방도가 없으니, 가난한 이들은 막막할 따름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남겨진 최후의 보루인 길거리에서마저 이들을 쫓아낼 목적으로, 사람들은 ‘적대적 건축’(hostile architecture)을 고안해 내기에 이르렀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일자리든 집이든 사랑의 손길을 찾으리라는 희망으로 도시의 끝에서 끝으로 배회하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베풂도 한줄기 빛이 됩니다. 그러나 정의가 넘칠 것 같은 곳에서조차 그들은 폭력과 학대를 당하기 일쑤입니다. 제때에 수확하려고 온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중노동에 시달려도 그들이 받는 임금은 터무니없이 적습니다. 안전하지 못하고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 때문에, 그들은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실업 수당이나 각종 보조금, 심지어 질병에 대한 대비책도 없습니다.

시편 저자는 가난한 이들을 약탈하는 부자들의 태도를 사실적으로 신랄하게 묘사합니다. “그는 가련한 이를 잡아채려 노리다가 그물로 끌어당겨 잡아챕니다”(시편 10,9[9,30]). 마치 사냥당하듯, 가난한 이들은 덫에 사로잡혀 종살이로 끌려가고 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다수의 가난한 이들은 마음을 닫아 버리고 다른 이들 눈에 띄지 않기만을 바랍니다. 간단히 말해서,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자주 멸시받고 참기 힘든 성가신 존재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모든 면에서 투명 인간처럼 되어 버렸고, 사회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거나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점점 더 집에서도 이방인이 되어 가고, 이웃들 사이에서도 소외되어 갑니다.

 

 

3. 이 시편의 배경은, 가난한 이들이 견뎌야 하는 불의와 고통과 좌절 때문에, 슬픔에 젖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편 구절에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아름다운 정의가 나옵니다. 가난한 이들은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입니다(시편 9,11 참조). 가난한 이들에게는 주님께서 그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난한 이들은 신뢰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시편 저자는 이러한 신뢰의 이유도 제시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알기’ 때문입니다(시편 9,11 참조). 성경에서 이러한 ‘앎’은 애정과 사랑의 인격적 관계를 가리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참으로 인상적인 이러한 표현은 오로지 하느님의 위대하심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위대하심은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와 관계를 맺으시는 방식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 권능은 모든 인간의 기대를 능가하고, 하느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해 주시는 것’(시편 9,13 참조)으로 드러납니다. 바로 주님에 대한 이러한 신뢰, 주님께서는 결코 저버리지 않으시리라는 이러한 확신이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결코 저버리지 못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난한 이들은 언제나 자신을 기억해 주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은 가난한 이들이 고통받는 현 상황을 뛰어넘어 해방의 길로 나아가게 해 줍니다. 해방의 길은 마음을 가장 굳세게 해 주고 바꾸어 주는 길입니다.

 

 

4.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성경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또한 그들을 ‘지켜 주시고’, ‘변호해 주시며’, ‘구해 주시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마침내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께서 결코 그들의 간구 앞에서 침묵하거나 무관심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를 베푸시며 아니 잊으시는 분입니다(시편 40[39],18; 70[69],6 참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며, 결코 그들을 도와주지 않으시는 일이 없습니다(시편 10,14[9,35] 참조).

우리는 수많은 장벽을 세우고 문을 닫아걸어 놓고서, 문밖에 남겨진 사람들의 희생으로 얻은 재산을 가지고 스스로 안전하다고 여기는 망상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대로, “주님의 날”(아모 5,18; 이사 2-5장; 요엘 1-3장 참조)에는 나라들 사이를 가르던 장벽들이 무너지고 다수의 연대가 소수의 교만을 대신할 것입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소외는 오래 이어질 수 없습니다. 이 수많은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높아져 온 지구를 뒤덮을 것입니다. 프리모 마촐라리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의 불의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화약통입니다. 이 화약통에 불이 붙으면 세상은 폭발할 것입니다.”

 

 

5.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여 외치는 성경의 절박한 호소를 결코 피할 수 없습니다. 어디를 보더라도, 하느님 말씀은 가난한 이들, 타인에게 종속되어 생활필수품조차 부족한 이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억압받는 이들, 비천한 이들, 땅에 쓰러져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무수히 많은 가난한 이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과 당신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우리가 예수님의 이러한 동일시를 부정한다면 복음을 거짓되게 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계시를 흐려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고자 하신 하느님께서는 너그러우시고 자비로우시며 마르지 않는 선과 은총의 아버지이십니다. 특히 실의에 빠져 미래의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가장 먼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루카 6,20)로 시작되는 참행복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어찌 주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역설적 메시지는 하느님 나라가 가난한 이들의 것임을 뜻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를 받을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과 마주칩니까! 시간이 지나고 문명이 발전할수록 가난한 사람들의 수는 줄어들기보다 오히려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수 세기가 흘렀는데도 참행복은 더욱더 역설인 듯 여겨집니다. 가난한 이들은 늘 더 가난해져 왔고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가난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이들을 중심으로 당신 나라를 세우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셨지만 그분께서는 당신 제자들인 우리에게 이를 이끌어 나갈 임무를,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줄 책임과 더불어 맡기신 것입니다. 특히 우리 시대에는 희망을 되살리고 신뢰를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이러한 책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선포와 증언이 지니는 신뢰성이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6.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며 교회는 자신이 한 백성임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는 여러 나라들로 퍼져 나가, 함께하는 구원 여정에서 그 누구도 자신이 이방인이거나 버림받았다고 느끼지 않게 보장하라고 부름받은 한 백성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현실은 우리에게 그들 안에서 고통을 겪고 계신 주님의 몸을 멀리하지 말라고 요구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의 몸을 어루만지고 진정한 복음화인 봉사에 직접 투신하라고 부름받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노력은 복음 선포와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는 그리스도 신앙의 현실 감각과 역사적 타당성을 드러내 줍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생기를 주는 사랑은, 그분 제자들이 사회생활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고 폐쇄적 개인주의에 갇혀 있거나 영적 친교를 나누는 소모임 안에 숨어 있을 수 없게 합니다(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183항 참조).

슬프게도 우리는 최근 가난한 이들의 위대한 사도인 장 바니에의 선종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의 헌신적 노력은 소외된 이들과의 연대를 드러내고 그들을 발전시키는 새로운 길을 열었습니다. 하느님 은총으로, 장 바니에는 중증 장애를 지닌 형제자매에게, 흔히 사회에서 배척받곤 하는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온 생애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옆집의 성인”이었습니다. 장 바니에의 열정에 이끌려 그의 주변으로 모여든 많은 사람들과 젊은이들은, 수많은 약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그들의 웃음을 되찾아 주고자 날마다 노력하면서 소외와 고독에 맞설 참된 구원의 ‘방주’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장 바니에가 보여 준 이러한 증언에 힘입어 무수한 사람들의 삶이 바뀌었고, 세상은 가장 약하고 힘없는 이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게 되었고, 확고한 희망이 생겨났으며, 오늘날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가시적이고 분명한 구체적인 사랑의 징표들이 드러났습니다.

 

 

7.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한 선택, 사회가 저버린 이들을 위한 선택”(?복음의 기쁨?, 195항)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부름받은 우선적 선택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교회의 신뢰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수많은 힘없는 형제자매들에게 참다운 희망을 전하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제자들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이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들과 기꺼이 나눔으로써 스스로 힘을 얻고 복음 선포에 힘을 실어 주기 때문입니다.

올해 세계 가난한 이의 을 맞이하여,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일상생활 안에서, 지원 사업에 그저 동참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합니다. 물론 지원 사업은 꼭 필요한 일이며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더 나아가 모든 이가 온갖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 각자에게 더욱더 관심을 기울이도록 격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사랑의 관심에서” 가난한 이들과 그 진정한 복지 증진을 위한 “참다운 관심이 시작됩니다”(?복음의 기쁨?, 199항).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번영을 늘리는 데에만 급급한 소비주의 문화와 버리는 문화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희망을 증언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본질을 재발견하고 하느님 나라를 구체적이고 힘 있게 선포하려면 사고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또한 희망은, 한순간의 열정이 아닌 오랜 시간 지속적인 노력으로 가난한 이들과 동행하는 데서 생겨나는 기쁨을 통해서도 전달됩니다. 가난한 이들의 진정한 희망은, 우리가 그들에게 짧은 시간을 할애하고 만족해하는 모습을 볼 때가 아니라, 우리의 희생이 보답을 바라지 않는 거저 주는 사랑의 행위임을 느낄 때 생겨납니다.

 

 

8. 많은 자원 봉사자 여러분이 계속 헌신적으로 봉사해 줄 것을 당부합니다. 자원 봉사자들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의 중요성을 먼저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만나는 가난한 모든 사람 안에서 그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을 찾으라고 권고합니다.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그들의 물질적 필요에 멈추지 말고, 그들 내면의 선함을 발견하고 그들의 배경과 표현 방식에 주의를 기울여 참된 형제적 대화를 시작하라고 여러분께 권고합니다. 이념적 정치적 입장이 초래한 분열을 뒤로하고 그 대신에 본질에 시선을 고정합시다. 곧, 가난한 이들은 넘쳐 나는 말이 아니라 사랑의 눈길과 활짝 내민 손을 호소하고 있다는 데에 시선을 고정합시다. “가난한 이가 겪는 최악의 차별은 영적 관심의 부족”(?복음의 기쁨?, 200항)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옆집의 성인들”을 통하여, 곧 자신의 소박한 삶으로 그리스도 사랑의 힘을 명확히 보여 주는 사람들을 통하여 가시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 방식과 수많은 수단을 활용하시어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으십니다. 분명 가난한 이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단지 우리가 제공하는 따뜻한 식사나 빵 한 쪽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그들을 일으켜 세워 주는 우리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또한 다시금 따스한 애정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우리의 마음과,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우리의 동행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9. 때때로, 아주 사소한 것이 희망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 잠시 멈추어 미소 짓고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한 번만이라도, 통계 숫자는 생각하지 말아 봅시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의 업적과 계획을 과시하고자 인용하는 통계 수치가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은 만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외로운 사람들이며, 우리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나누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른이든 아이든 가난한 이들은 모두 친절한 말 한 마디를 기대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우리를 구원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만나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가난과 궁핍이 구원의 힘을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은 비논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어떠한 인간도 하느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1코린 1,26-29). 인간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볼 때에는 이러한 구원의 힘을 이해할 수 없지만, 신앙의 눈으로 우리는 이 힘의 작용을 이해하고 우리 스스로 그것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의 심장에는 그러한 구원의 힘이 약동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의 힘은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며 모두가 회개를 향한 참된 순례에 동참하여 가난한 이를 알아보고 그들을 사랑하게 해 줍니다.

 

 

10. 주님께서는 당신을 찾고 당신께 간구하는 이들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가련한 이들의 울부짖음을 아니 잊으십니다”(시편 9,12). 주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희망은 참혹한 상황에도 굴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이 사랑이 어떠한 고통이나 배척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하느님께서 주신 그들의 존엄을 그들에게서 빼앗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께서 몸소 그들의 존엄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시리라는 확신 안에서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는 가장 힘없는 당신 자녀들의 처지에 무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재앙과 재난을 보시고 손수 처리하시며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시편 10,14[9,35] 참조). 가난한 이들의 희망은, 주님께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에게 참된 정의를 찾아 주시며 그들의 마음을 굳세게 하시어 그들이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게 하실 것이라는 확신 안에서 굳건해집니다(시편 10,17[9,38] 참조).

 

주 예수님의 제자들이 참된 복음 선포자가 되고자 한다면, 구체적인 희망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 그리고 가난한 이에게 희망과 위로를 전하기를 염원하는 모든 이에게 당부합니다. 이번 세계 가난한 이의 을 맞이하여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효율적으로 협력하여, 어느 누구도 친교와 연대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끼지 않게 도움을 주시기를 당부합니다. 여러분이 새로운 미래를 선포하는 예언자의 다음 말씀을 언제나 소중히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 3,20).

 

 

바티칸에서
2019년 6월 13일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

프란치스코

 

<원문 Message of His Holiness Pope Francis, Third World Day of the Poor, The hope of the poor shall not perish for ever, 2019.6.13., 영어와 이탈리아어 참조>

영어: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en/messages/poveri/documents/papa-francesco_20190613_messaggio-iii-giornatamondiale-poveri-2019.html     

이탈리아어:
http://w2.vatican.va/content/francesco/it/messages/poveri/documents/papa-francesco_20190613_messaggio-iii-giornatamondiale-poveri-2019.html



[기사원문보기]
CBCK 2019-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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