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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간 교우촌 신앙 유산 이어받은 공소

[공소(公所)] 15. 수원교구 향남본당 사창리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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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향남본당 사창리공소는 공소 설립 12년 만에 공소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기증하고 모금한 땅과 건축 기금으로 지어져 봉헌됐다.

사창리공소 신자들은 유서 깊은 양간 교우촌의 신앙 전통을 물려받아 성모회와 성소후원회, 연령회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사창리공소 내부.

 


‘사창리’는 전국에 9곳이 있다. 북한의 황해남도 신천군과 평안북도 벽동군에 있는 마을까지 합치면 11곳이나 된다. 한자로 다르게 표기되는 것도 있지만, 사창리는 곡식을 모아 저장해 두는 곳집이 있는 씨족 마을에 주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전남 장성ㆍ무안, 전북 고창, 충북 괴산ㆍ음성, 경남 창녕, 충남 태안, 강원도 화천 등 주로 농촌 지역에 사창리가 자리하고 있다.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사창리(社倉里) 역시 고려 때부터 곡식 창고가 있던 광산 김씨와 함평 이씨의 집성촌이다.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정문회화로 21-6에 자리한 수원교구 향남본당 사창리공소는 1970년 용소리공소에서 분가해 설립됐다.


끝나지 않은 종교 박해

사창리공소 소개에 앞서 조선 왕조 시대 천주교 박해 이후 양간 지역 신앙 공동체 재건 과정을 잠시 살펴보자. 1866년 병인박해 이후 10년 만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에 돌아왔다. 1876년 2월에 ‘강화도 조약’이라 불리는 조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그해 5월 10일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가 한양에 들어왔다. 두 선교사는 각각 강원도와 경기 지역을 맡아 교회 재건과 복음 선포를 위해 공소 복구 및 신축, 전교회장 양성에 모든 힘을 쏟았다. 이듬해 1877년 리델 주교와 두세ㆍ로베르ㆍ뮈텔ㆍ코스트 신부도 속속 입국했다. 리델 주교는 기도서와 교리서를 발간할 인쇄소를 설립하고,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소신학교 건립도 추진했다. 또 블랑ㆍ드게트 신부는 남부 지방, 두세ㆍ로베르 신부는 황해도 지역, 뮈텔 신부는 서울과 경기도 지역을 맡아 사목했다.

하지만 아직 박해의 불씨가 남아 있었다. 조정은 천주교에 대한 공개적인 대규모 박해를 일으키려 하지 않았지만 리델 주교와 드게트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해 옥에 가두었다. 고문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몇몇 신자들은 순교했다. 또 체포된 선교사들은 중국으로 추방됐다.

선교사들은 1882년 조미통상수호조약 이후 다시 조선으로 들어왔고, 마침내 1886년 6월 4일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로 선교사들의 선교 자유를 보장받았다. 이로써 1888년 한강 이남 첫 본당이 설립됐다. 바로 ‘갓등이’(왕림) 본당이다. 갓등이 성당이 자리한 봉담읍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정남면, 향남면, 양감면에도 주요한 공소들이 재건됐다. 「수원교구 50년사」에 따르면 당시 이 지역 신앙공동체의 중심지였던 양간공소에는 100명이 넘는 신자들이 거주했다고 한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한국 천주교회는 교세 성장의 위기를 맞는다. 일제의 담배전매 정책으로 산골에서 화전을 일구어 담배 농사를 짓고 옹기를 구워 생계를 유지하던 교우들이 점차 교우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또 일제는 ‘정교분리’를 내세우고 ‘포교 규칙’을 제정해 교회를 통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난과 빚에 쪼들리게 된 교우들은 신앙생활과 멀어져 갔고 그 결과는 신자 수 감소로 나타났다. 양간공소도 이 시기 교우 수가 40명으로 절반 이상이 줄었다.
 

 

사창리공소 입구 좌측면에 모셔진 루르드 성모상.


교우촌 전통 이어받은 공소

해방 후 1955년 갓등이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임응승(요한) 신부는 본당 분가를 추진한다. 그래서 1957년 노기남 주교는 발안공소를 본당으로 신설하고 화성시 양감면, 우정읍, 팔탄면, 장안면, 향남읍, 오산시 일부를 사목구로 정했다. 발안본당은 이 지역 북시기, 귀꽃, 압실, 벌음, 오산, 느지지, 양감, 꽃밭, 버섯말, 거묵골, 배꽃, 장안, 조암, 은행동, 발라곶 등 15개 공소를 관할했다. 1963년 수원교구 설정 이후 발안본당은 화성 남부 지역 신앙 공동체의 구심점이 돼 교세를 성장시켜 조암본당(1973년)과 향남본당(2008년)의 모본당이 된다.

수원교구는 유서 깊은 교우촌 지역을 기반으로 둔 본당과 공소가 많았다. 이에 초대 수원교구장 윤공희 주교는 사목 지침 ‘수원교구 설정에 즈음하여’에서 “우리는 이미 24개의 본당을 가지고 있고, 그중에는 북수동 성 미카엘성당과 같이 전국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본당도 있고, 또 이번에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된 성 요셉성당과 같이 우리 선조 치명자들이 왕래하며 박해의 쓰라린 고통을 겪고, 더구나 우리 수선 탁덕 치명 복자 안드레아 김 신부님의 거룩한 유해가 묻혔던 유서 깊은 본당도 있습니다. 이와같이 작고, 크고, 오래고, 새롭고 또는 치명자들의 발자취로 다져진 이 본당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정신이 철저한 신자들로 가득하게 된다면 우리 교구는 그리스도의 튼튼한 모퉁잇돌 위에 견고하게 서게 될 것입니다”라고 기대했다.

사창리공소는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고 복음 정신으로 탄탄하게 다져진 유서 깊은 양간 교우촌의 전통을 이어받아 1970년 8월 23일 설립됐다. 양감면 사창리와 정문리, 요리, 향남읍 백토리, 길성리를 관할하고 있다. 공소 건물도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지었다.

1979년 12월 공소건축위원회가 구성돼 공소 건축 기금을 조성했다. 송기덕(베드로) 건축 위원장이 자신의 집 옆 대지 100평을 기증하고, 윤성규(요한), 조태식(베네딕토), 최용희(바오로), 김영식(바오로), 문병구(루카)를 비롯한 교우들이 기금을 조성해 32평 규모의 벽돌집 공소 건물을 지어 공소 설립 12년 만인 1982년 5월 9일 준공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14일 수원교구 총대리 황익성 신부 주례로 공소 봉헌식을 거행했다.

공소 교우들은 성모회와 성소후원회, 연령회, 행복한가정운동 등을 조직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양감면 출신인 수원교구장 이용훈 주교도 신학생 시절 사창리공소에서 교우들에게 성경과 교리를 가르쳤다고 한다.

현재 사창리공소 교우 수는 20여 명에 불과하다. 이들 대부분은 공소에서 4㎞ 떨어진 향남성당으로 가서 주일 미사에 참여하고 성사생활을 해 지금은 공소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가끔 공소를 찾는 순례자만이 방문하는 곳이 됐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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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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