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 그때 그 순간 40선] 8. 신유박해(1801년)
신유박해 당시 처형장인 서소문 밖 네거리로 끌려가는 순교자들을 묘사한 닥종이 인형. ‘박해 이야기’를 주제로 한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정미숙 수녀의 작품으로, 2013년 2월 서울 중림동약현성당 내 서소문순교자기념관에서 전시됐다.
정조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첫 번째 대박해
1801년 신유박해는 정조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첫 번째 대박해로, 1801년 1월 10일(음)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의 금교령으로 시작하여 12월 22일(음) ‘척사윤음’으로 종결되었다. 흔히들 박해의 원인을 사회·정치·종교적 이유로 설명한다. 그러나 어떠한 사건은 단 한 가지의 이유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맞물려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날처럼 ‘종교’라는 관념이 미분화되었던 조선 후기 전통 사회에서는 서구에서 전래한 천주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 조선 정부가 1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천주교에 대해 오해하고 탄압한 이유를 찾아보도록 하자.
먼저 박해(迫害)라는 용어에 대해서 살펴본다. 오늘날 ‘박해’라고 하는 용어는 당시에 ‘군난(窘難)’이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었다. 천주교 신앙이 금지된 나라에서, 그것도 교우촌의 어려운 삶 속에서 국가와 공권력이 천주교 신자를 탄압하였다. 신자의 처지는 그전보다 더 ‘궁핍하고 어려워지기 때문’에 ‘군난’이라고 표현한 듯하다. 정부에서는 천주교를 ‘사학(邪學, 정학인 유학이 아닌 이단적인 학문을 가리킴)’이라 지칭하였으므로,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의미에서 ‘위정척사(衛正斥邪)’, 즉 정학인 유학을 보호하고 사학인 천주교를 배척한다는 명분으로 천주교를 박해하였다. 조선 정부에서는 1801년 천주교 탄압 사건을 가리켜 ‘신유사옥(辛酉邪獄)’이라고 불렀는데, 곧 신유년에 벌어진 사학에 대한 옥사 사건, 즉 형사 사건을 뜻한다.
정순왕후 김씨의 박해령을 들어보자. “선왕(先王, 정조를 가리킴)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정학이 밝으면 사학은 저절로 그친다’ 하셨는데…. 지금 이른바 사학은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인륜을 파괴하고 교화를 배반하여 오랑캐와 금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라 하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속이고 미혹하는 데 물드는 것이 철모르는 아이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고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1989년 지정된 조선 제22대 왕 정조(1752~1800) 정부 표준 영정. 이길범 작. 문화체육관광부 제공
성군(聖君)이었던 정조는 서양의 과학기술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고, 수원성을 축조할 때에도 정약용에게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주어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중기(起重機)를 만들어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산사건(1791년) 이후 천주교 서적을 소각하면서 서양의 자연과학 서적들도 상당 부분 소실되기도 하였다. 정조의 죽음으로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였고,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그동안 탕평책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천주교 배척’이라는 명분으로 남인에 대한 탄압과 맞물려 신유박해가 벌어졌다.
주문모 신부 자수·황사영 백서로 박해 확대
대왕대비의 박해령으로 서울과 포천·양근·여주 및 충청도 등지에서 천주교 신자가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자수는 예상과 달리 박해를 확대하는 결과를 냈다. 이우집과 유관검 등의 심문에서 ‘서양의 큰 배가 와서, (만일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력을 통해) 한바탕 결판을 낼 것’이라는 진술이 나왔다. 이는 서양의 무력에 힘입어 조선 왕국을 공격한다는 국가 반란죄 혹은 역모죄에 해당하므로 매우 위중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박해 후기에 「황사영 백서」가 발견됨으로써 그러한 내용이 확증되기에 이르렀다. 「백서」의 내용 중에는 교회 재건의 방안 가운데 ‘수백 척의 배에 병사 5~6만 명과 대포 등 병기를 싣고 조선 정부와 교섭해 달라’는 내용과 ‘조선을 중국의 보호국으로 삼고, 조선 왕을 중국 황실의 부마로 삼아달라’는 제안이 있었다. 물론 황사영은 신문 중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다. 자신은 천주교가 세상을 구해주는 좋은 약이라고 생각했으며, 정도(正道)라고 인식했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제 「백서」라는 물증을 통해서 천주교의 사건을 외국과 결탁하여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역모죄로 확증하기에 이르렀다. 황사영은 12월 10일 ‘궁흉극악 대역부도죄(窮凶極惡 大逆不道罪)’로 서소문 밖 네거리 사형터에서 능지처사형으로 순교하였다.
이백만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가 2020년 2월 바티칸 민속박물관을 찾아 고문서연구실 관계자와 함께 ‘황사영 백서’ 진본을 살펴보고 있다.
정조의 중립적인 정치 균형이 무너지면서 노론 벽파의 남인 시파에 대한 공격이 천주교인과 맞물려 박해는 더 거세어졌는데, 무엇보다도 위패를 훼손하고 조상신에게 절하지 않았던 천주교의 제사 거부가 당시 사대부의 예법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정부는 천주교 박해의 명분을 무부무군(無父無君), 곧 ‘아비도 임금도 없는 천주교인’에서 찾고 있었다. 또한, 천주교는 사람은 모두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요 동포라는 평등사상을 지향하고 있었는데, 이는 양반관료제를 기반으로 하는 신분 사회였던 조선 왕국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요소였다. 따라서 이처럼 정치·사상·사회적인 차이에 의해 조선 왕조는 천주교를 탄압하였다.
황사영이 8개월간 머물며 백서를 쓴 원주교구 배론성지 내 토굴.
산골로 숨어들어 교우촌 이루고 신앙생활
신유박해의 결과 조선 천주교회는 다시 목자 없는 교회가 되었고, 신자는 물론 천주교 서적과 성물을 모두 소각함으로써 남아 있는 교우들은 산골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형성하여 근근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도들은 남아 있는 천주교 서적을 가지고 다시금 신앙생활을 하였고, 이러한 교우촌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천주교가 지방 곳곳에 퍼지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신유박해 때 관찬 기록을 중심으로 묶어진 「사학징의」 말미에는 당시 소각된 천주교 서적 목록이 나와 있는데, 총 199책 중에서 한글로 되어 있는 책이 70 이상인 것으로 보아, 이미 천주교는 한글을 사용하는 서민들에게 퍼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천주교는 서양의 종교이지만 초기 한국교회에서는 서민의 종교, 민중의 종교를 향해 나가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놀랍게도 전국적인 박해로 말미암아 뿌리 뽑고자 했던 천주교는 순교자들의 피가 씨앗이 되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교우촌이 확산하고 다시금 성직자 영입 운동이 펼쳐지고 마침내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조선 전교를 담당하게 되어 1831년에 조선대목구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바로 한국 교회의 탄생이 매우 든든한 순교자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기초가 다져있었기 때문이었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