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5. 선교 보호권과 교황청 포교성성
교황 파견 선교 사제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넉 달 보름 동안 선교사 양성 교육을 받은 후 1826년 2월 5일 선교지인 코친차이나를 향해 출항했다. 샤를르 쿠베르탱, ‘출발’, 1868,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이 그림은 쿠베르탱이 성 브르트니에르, 도리, 볼리외, 위앵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 자신이 참석했던 1864년 7월 15일 거행된 이들 교황 파견 선교 사제들의 파견식을 회상해 그린 작품이다.
선교사 양성 교육 받고 선교지로 향하다
저는 1825년 9월 17일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해 넉 달 보름 동안 선교사 양성 교육을 받은 후 교황 파견 선교 사제로 임명됐습니다. 그리고 1826년 2월 5일 보르도 항에서 선교지 코친차이나로 향하는 네덜란드 상선 에스페랑스(l’Esperance)호에 올랐습니다.
교황 파견 선교 사제 양성 기간은 참으로 행복하고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테오판 베나르(Theophane Venard) 신부는 이 양성 기간을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행복이 파리외방전교회에 머무는도다. 그곳에서 근심이라고는 알지 못했다. 우리는 신학교에서 매우 행복하게 지냈다. 나는 우리 소중한 신학교 복도들의 고요함을 좋아했으며, 독방의 평화, 생활 규칙, 길었지만 너무나도 짧게 여겨졌던 공부 시간과 묵상 시간들, 휴식 시간의 쾌활함, 사람들의 애덕, 매혹적인 경당의 모습을 사랑했다.”
그렇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선교사 양성 기간은 ‘이웃을 위해 사는 것이 나를 위해 사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라는 걸 일깨워주는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가서 모든 민족을 가르쳐라”(Euntes Docete Omnes Gentes, 마태 28,18-19)라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 표어가 몸에 배게 하는 수련 시간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슬픈 일은 거룩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선교사 양성 기간 동안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1테살 4,3)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모든 이가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의 사명입니다. 이는 역사의 정해진 때에 복음의 한 측면을 반영하고 구현하고자 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이 사명은 오로지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해야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가장 소외된 이들을 가까이하신 모습, 그분의 가난, 그리고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여러 삶의 방식을 우리 삶으로 되살려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입니다.
순교 각오한 선교사 파견 예식 장엄
선교사 파견 예식은 장엄했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장상뿐 아니라 파견식에 참여한 모든 이가 선교지로 떠나는 모든 사제의 발에 거룩한 입맞춤을 했습니다. 살아서 다시 볼 수 없는 마지막 작별 인사였습니다. 본부 정원에는 교황 파견 선교 사제를 태우고 보르도 항으로 떠날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교지로 떠나는 저희를 위해, 그리고 그곳에서 얼마 안 돼 순교할 저희를 위해 남은 자들은 “출발하라, 출발하라, 복음의 영웅들이여! 그대들이 기도로 청하였던 그 날이 왔도다. 이제 그 무엇도 그대들의 열정을 묶어두지 못하리. 출발하라, 벗들이여. 그대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라며 파리외방전교회 노래를 목청껏 불렀습니다.
저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서 1826년 7월 1일 자바섬의 바타비아(자카르타)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마카오까지 가는 배를 구하지 못해 그해 8월 28일 바타비아에서 싱가포르로 가는 배를 얻어 탔습니다. 싱가포르에서는 한 영국인 선장의 도움으로 그의 배를 타고 1826년 10월 중순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가 있는 마카오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왕국의 선교 보호권 폐단을 척결하고, 선교 업무를 총괄하기 위해 1622년 교황청 포교성성을 신설했다. 그림은 로렌초 베르니니가 설계하고 건축 감독한 포교성성 전경.
스페인·포르투갈에 식민지 선교 보호권 위임
오늘은 아시아와 중국 선교지의 재치권 문제에 관해 간략히 설명하려 합니다. 이 지역 선교에 대한 교황청의 역할은 미미했습니다. 16세기 이후 중국과 아시아 선교 책임은 포르투갈 국왕에게 있었습니다. 포르투갈 국왕이 파견한 수도회들이 중국 교회를 관할했습니다. 중국에 관한 모든 것에 포르투갈이 교황청보다 우선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수장은 교황입니다. 하지만 국제 정치 질서는 늘 힘의 논리에 좌우됩니다. 15세기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의 중심축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나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두 나라 국왕은 식민지로 개척한 새 영토에 가톨릭교회를 세우는 것을 의무라고 여겼습니다. 교황청은 아시아와 신대륙에 선교사를 파견하거나 교회를 세울 여력이 없었습니다. 해외 선교사들을 지원할 배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신변을 보호할 군사력도 전무했습니다. 교황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왕에게 식민지 개척의 독점권을 인정하면서 그 식민지에 대한 선교 활동도 병행할 권한과 의무를 허락했습니다. 교회는 이를 ‘선교 보호권’(宣敎 保護權, Padroado)이라 불렀습니다. 선교 보호권을 받은 두 국왕은 자국 관할 영토에서 교구 설립, 주교 추천 및 임명, 선교사 파견, 교회 운영 및 관리에 관한 모든 권리와 책임을 졌습니다.
비오 2세 교황(재위 1458~1464)은 1461년 포르투갈 아폰수 5세 국왕에게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선교 보호권’을 위임했습니다. 이후 포르투갈 국왕은 두 대륙 가톨릭교회의 실질 책임자가 됐습니다. 이때부터 19세기 초ㆍ중반까지 포르투갈 임금과 그의 선교사들은 중국과 아시아 가톨릭교회를 좌지우지했습니다.
포르투갈은 1557년 유럽과 중국을 잇는 무역 거점으로 마카오를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에 중국 선교를 맡겼습니다. 1565년 마카오에 가장 먼저 진출한 예수회는 중국과 일본 선교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민족 정복·식민지 지배 정당화 근거로 악용
불행하게도 선교 보호권은 처음부터 교황청이 목적한 대로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폐단이 여기저기서 터졌습니다. 가장 큰 골칫거리는 두 나라 국왕이 선교 보호권을 제한 없이 남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사들을 마치 자국 관리처럼 통제했습니다. 국가 통치 정책에 순응하는 성직자와 수도자만이 주교와 장상으로 임명됐습니다. 선교 보호권은 선교의 도구가 되기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이민족 정복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됐습니다. 예수회가 현지인 보호 정책을 적극 펼쳤으나, 선교지에서는 구원을 명목으로 원주민의 강제 개종이 성행했고, 노예제를 인정하기까지 했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왕은 자신이 파견한 선교사 외에는 누구도 선교 보호권 관할 내에서 선교 활동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교황청조차 두 나라의 양해를 얻지 않고서는 선교 보호권 지역에 대한 선교 정책 수립이나 선교사 파견을 독자적으로 할 수 없었습니다. 설상 신임장을 받은 교황 파견 선교 사제라 할지라도 현지에서 갖은 방법으로 이들을 방해했습니다.
또 17세기부터 영국과 네덜란드가 동양 무역권을 차지해 개신교의 진출이 빈번해지면서 선교 업무를 총체적으로 관장할 필요성이 대두됐습니다. 이에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재위 1621~1623)은 1622년 선교 업무를 총괄하고 지도, 감독하는 교황청 포교성성을 신설했습니다. 포교성성은 선교 보호권과 수도회의 특권을 축소하는 일부터 착수했습니다. 이를 위해 교구 사제들의 해외 선교 참여를 적극 권장했습니다.
포교성성은 선교 보호권의 폐단을 척결하기 위해 교황 파견 선교 사제들에게 선교 활동에만 전념하고 선교지 관습과 전통문화를 존중할 것을 권장했습니다. 또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해 토착 교회를 설립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포교성성은 교황 파견 선교 사제들이 정치에 간여하고 상업 활동을 하는 것을 일절 금했습니다. 포교성성의 이러한 선교 지침은 직할 선교 조직인 파리외방전교회의 기본 정신으로 발전했습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