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결핵성척추염’에 걸려 평생 굽은 등으로 살아온 정충자씨가 가족을 부양했던 미싱기를 만지고 있다.
재단사로 일해 동생들 모두 대학 보내
부모님 떠나고 동생들과도 연락 끊겨
코로나 이후 일 놓고 수입 없이 생활
“몸이 아프다고 불평만 하면 되나요. 함께 도우면서 살아야죠.”
‘결핵성척추염’(척추 카리에스)에 걸려 평생 굽은 등으로 살아온 정충자(마르첼리나, 83)씨는 자기 몸도 가누기 힘든 상황에서 더 어려운 이웃 이야기를 했다. 그는 타고난 긍정적 성향과 진취적 성격으로 신앙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 정씨는 중학교 2학년 때 척추에 이상이 생기기 전까지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발병 후에도 공부는 늘 전교 1등이었다. 처음 질환을 앓기 시작했을 땐 ‘금방 지나가겠지’ 했다. 주변에 제대로 된 병원도 없어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병이 점차 심해져 대전 오빠네로 갔다.
오빠네 집으로 이사한 후에는 통증이 사라졌고 정씨는 전학 가서도 성적은 1등이었다. 선생님은 그의 재능을 알아봤고,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양재학교 진학을 도왔다. 어릴 때부터 한복 만드는 법을 어머니에게 배웠기에 또래를 가르치는 교사 역할까지 하며 학교생활을 열심히 했다. 정씨는 “몸만 성했으면 교수를 하고 싶었는데?”라고 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 졸업 후, 주변 양장점에서 일하자는 제의가 밀려왔다. 오빠 둘은 출가해 가정을 꾸렸고, 남은 가족을 돌봐야 할 사명이 정씨에게 주어졌다. 정씨는 부모와 동생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가 양장 일을 시작했다. 부산 국제시장에서 손꼽히는 재단사로 소문나 일거리가 몰렸다. 직원도 10명이 넘었다. 그 덕에 동생들은 모두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새벽부터 나가 고된 일을 하고도 집안일을 멈추지 않았던 그는 결국 길에서 쓰러졌다. 병이 재발한 것이다.
그 길로 하반신을 전혀 쓸 수 없게 됐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백령도에서 군 생활을 하던 오빠에게 연락해 그곳 병원에서 치료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휠체어에 몸을 싣고 백령도로 향한 정씨는 3년간 끈질긴 재활 끝에 일어설 수 있게 됐다. 도심으로 거처를 옮긴 정씨는 다시 양장 일을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가족들도 하나둘 떠나고, 동생들과도 연락이 끊겼다. 10년 전 홀로 서울 연희동 반지하에 월세로 들어와 간단한 수선일을 하던 정씨는 코로나 이후 완전히 일을 놓게 됐다.
정씨는 현재 아무런 수입 없이 홀로 노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 정씨는 “하느님 믿으면 못할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만 되면 새벽 미사를 빠지지 않았고, 기도회 대표를 맡기도 했다.
“인생 참 기구하죠. 하지만 이런 저에게도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껏 다 베풀면서 살았어요. 이제는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지만 받은 만큼 또 다 돌려주고 갈 생각입니다.”
후견인 : 안은희 율리아 /서울대교구 연희동본당 8구역장
“정충자씨는 지체장애 5급에 기초생활보장수급자입니다. 별도 수입과 재산이 없고, 가족이나 보호자도 없이 독거생활을 하고 계십니다. 점점 연로해지고 있어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성금계좌 (예금주 : 가톨릭평화방송)
국민 004-25-0021-108
농협 001-01-306122
우리 454-000383-13-102
정충자씨에게 도움을 주실 독자는 28일부터 5월 4일까지 송금해 주셔야 합니다. 이전에 소개된 이웃에게 도움 주실 분은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 담당자(02-2270-2425)에게 문의 바랍니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