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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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하나] 상실의 경험이 새롭게 열어주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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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는 울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울면서 밥도 먹고 드라마도 봐요.”


교구 사별가족 돌봄 모임인 ‘치유의 샘’에 오시는 한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마지막 모임에서 옅은 미소와 함께 위의 말씀처럼 대답하셨지만, 선생님의 첫 모습은 생기가 전혀 없어 마치 그림자처럼 느껴졌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떠나보낸 그분은 생기가 전혀 없었고 모임 내내 멍하니 앉아 계시거나, 눈물을 멈추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을 위해 봉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함께 울어주고 등을 토닥이며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었습니다. 상실의 슬픔에 깊이 빠져 있는 선생님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봉사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하며(로마 4,18 참조) ‘치유의 샘’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한 주 그리고 한 주를 보내며 각기 다른 주제와 프로그램으로 모임을 진행했습니다. 선생님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내거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가도,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나 연신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언제라도 모임을 그만두고 떠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기억을 꺼내고 감정을 표현하는 이 자리가 선생님께 너무 고통스러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먼 거리를 오시면서도 단 한 번도 오지 않겠다는 말씀을 꺼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모임 내내 눈물을 쏟아낼지언정,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참가자들 앞에서 용기 있게 꺼냈고, 깊은 슬픔 속에서도 다른 참가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렇게 모임의 절반이 지났을 무렵, 선생님은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봉사자들의 정성이 담긴 간식, 사별의 경험을 함께 나누는 다른 참가자들의 위로, 자신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 존중해 주는 모습에, 선생님은 점차 마음의 문을 열고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를 내놓으며 함께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습니다.


8주간의 여정을 마치며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전에는 울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울면서 밥도 먹고 드라마도 봐요.” 여전히 잊혀질 수 없는 기억과 감정일지라도 이제는 사별의 경험이 오히려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바라보게 만들고 그들과 마음을 나누며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길을 열어준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말로 다할 수 없이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슬픔과 고통 앞에서 혼자가 아닙니다.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면, 나를 소중히 여기는 이들의 따뜻한 시선을 발견할 수 있고 그들이 내미는 손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상실의 고통과 슬픔 속에서 사랑하는 이가 나에게 바라는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요?



글 _ 허규진 메르쿠리오 신부(수원교구 제2대리구 복음화3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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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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