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교구장 정순택(베드로) 대주교는 성모 승천 대축일(8월 15일)을 맞아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묵시 12,6) 제목의 메시지를 8월 7일 발표했다.
정 대주교는 성모 승천 대축일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평탄한 길이 아닌, 어둠과 빛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걸어가야 하는 고된 여정”이라며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광야의 여정을 걸었던 것처럼, 일상 안에서 숱한 시련과 침묵의 시간을 인내와 겸손으로 이겨낸” 성모님의 모습을 본받자고 당부했다.
아울러 “바로 오늘, 광복절은 민족적 광야를 떠올리게 하는 날”이라며 “이날은, 우리에게 그저 과거를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희망을 준비하라는 부르심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정 대주교는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을 사례를 언급하며 “모든 변화는 언제나 작은 결단과 용기에서 시작된다”며 “오늘의 이 작아 보이는 변화가, 상처 입은 우리 민족의 광야를 지나 평화의 약속을 향한 첫걸음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전했다.
다음은 메시지 전문.
“거기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습니다.”(묵시 12,6)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희망의 순례자’로서 희년의 여정을 걷고 있는 오늘, 우리는 또 하나의 희망을 밝혀주는 성모 승천 대축일을 맞이합니다. 겸손하고 단순한 삶을 사셨던 성모님이 육신과 함께 하늘로 들어 올려져 영원한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구원의 약속을 보증하는 희망의 표징입니다. 이는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된 하느님의 구원 여정이 마침내 완성에 이를 것이라는 확고한 약속입니다.
이 희망의 약속은 성경 안에서도 깊이 있게 증언됩니다. 오늘 미사의 첫째 독서인 요한 묵시록은, 그 영광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상징적인 환시로 보여줍니다. 산고를 겪는 여인 앞에 크고 붉은 용이 나타납니다. 막 아들을 낳은 연약한 여인은 그 강력한 존재와 정면으로 맞설 수 없기에 광야로 달아나지만, 바로 그곳에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었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천사들이 용을 무찌르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이 환시는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삶을 깊이 비추는 말씀입니다. 이 여인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낳고 천상 영광에 들어가신 성모 마리아를 상징함과 동시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상징합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미 구원의 여정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그 여정은 여전히, 죄와 폭력, 죽음과 불의가 어지럽게 뒤엉킨 세상 속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긴장과 고통 속에 놓인 우리의 삶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광야의 여정’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느님을 믿고 복음을 따르더라도, 늘 빛에서 빛으로 나아가는 평탄한 길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둠과 빛, 세상의 가치와 복음의 가치, 복수와 용서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걸어가야 하는 고된 여정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여인이 광야를 견뎌냈듯이, 우리도 이 여정 속에서 주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이르기까지 광야의 여정을 걸었던 것처럼, 성모님 또한 인내와 겸손으로 일상 안에서 숱한 시련과 침묵의 시간을 지나셨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리를 마련하러 가신 아버지의 집에 다다르기까지, 때로는 광야와 같은 길을 걷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시련을 단번에 없애 주시지는 않지만, 그것을 견디고 이겨낼 힘과 은총을 주시며, 그 여정에 언제나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가 걷는 광야는 단지 개인의 삶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공동체와 민족도, 역사 속에서 때때로 광야와 같은 시련의 시간을 지나야 했습니다. 바로 오늘, 광복절은 그러한 민족적 광야를 떠올리게 하는 날입니다. 해방의 기쁨을 온전히 만끽하기도 전에 분단의 아픔이 밀려오기 시작한 이날은, 우리에게 그저 과거를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희망을 준비하라는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에,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서로를 향한 나눔의 실천을 다짐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작을지언정 그 나눔의 마음을 지니기만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안에서 큰 기적을 이루실 것입니다.
최근 남북 관계 안에서 미약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가 접경지 주민들의 안전과 긴장 완화를 위해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자, 북측도 이에 응답하듯 대남 방송을 멈추었습니다. 모든 변화는 언제나 작은 결단과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오늘의 이 작아 보이는 변화가, 상처 입은 우리 민족의 광야를 지나 평화의 약속을 향한 첫걸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랑하는 교형 자매 여러분,
이 복된 대축일에, 죄와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서 성모님을 그 영광 안에 들어 올리셨음을 기억하며,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또한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되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어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우리를 천상 본향으로 인도하실 주님을 굳게 믿으며 나아갑시다. 특별히 하늘로 들어 올려지신 동정 마리아께서 광야에서 주님을 찾는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 민족이 다시 하나 되고 평화를 찾도록 전구해 주시기를 청합시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평양교구장 서리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