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는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찾아가 그리움의 인사를 드린다. 성묘를 가는 길은 늘 그랬듯이 오롯이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시간이다. 감사하고 죄송했던 많은 일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을 스쳐 가며 잠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버지께 술 한잔을 올리고 즐겨 들으시던 음악도 들려드리며 내 마음속의 이야기를 하고 기도와 연도까지 바치고 나면 순간 마음이 한없이 평화로워지고 그간의 시간과 가족들에 대한 깊은 감사의 마음과 함께 앞으로 살아갈 시간에 대해 힘을 얻고 집에 오게 된다. 아버지께 대한 존경과 그리움을 담은 성묘는 나를 일으키는 힘이며 위로이다.
신앙인으로서 성지순례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삶이 힘들고 지칠 때 또는 신심 고양과 기도 지향을 위해 우리는 순례자가 된다. 미사 참례와 십자가의 길, 성체조배, 성인 유해 친구(親口), 묵상, 도보순례를 하며 주님과 성모님을 뵙고 성지의 성인, 복자, 순교자들의 행적과 신심을 배우고 그분들과의 일치(통공)를 통해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며 믿음이 주는 따뜻한 위로와 힘을 받는 은총의 시간을 만나게 된다.
이렇기에 수원화성순교성지에서의 순례 해설 봉사는 나에게 특별한 축복이라 생각한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의 한가운데 위치한 성지는 천주교 박해 시기에 죽음으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거룩한 순교 현장이기에 연중 내내 순례자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순례자들을 맞이하다 보면 조금은 힘들 때도 있지만, 환한 미소로 전해주시는 감사 인사는 큰 선물이며 봉사를 지속할 수 있게끔 하는 힘의 원천이다.
순례 해설을 준비하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신앙 선조들이 신앙촌을 방문하는 신부님과 타지 교우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 성사를 준비하고 손님을 맞이했던 마음가짐을 기억하고, 봉사하기 전에 주님과 성모님, 순교자들께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순례 봉사의 순간에 순교자분들께서 우리와 함께하시어 성지와 순교자에 대한 설명만이 아닌 순교 신심을 순례자분들께 온전히 전할 수 있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9월 순교자성월에는 순교자 현양의 밤 행사를 비롯해 단체 순례, 달빛순례 등 크고 작은 행사가 예정되어 있다. 벌써 가슴이 뛴다. 신앙이 주는 위로와 힘을 얻고자 오시는 순례자들을 위해 나 또한 희망의 순례자이며 봉사자로서 따뜻한 미소와 정성을 다하는 마음과 자세, 그리고 소중한 만남을 기다리며 한국교회의 주보이신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성모님께 기도드린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Ave Maria, gratia plena)”
글 _ 이창원 바오로(수원화성순교성지 순례해설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