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순교성지에서 2008년부터 시작된 ‘달빛순례’는 병인박해 때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의 순교 터를 순례하는 프로그램이다. 순교자들의 흔적을 보고 들으며 내 신앙을 돌아볼 뿐 아니라 순교 신심을 되새기는 시간이 되고 있다.
최근에는 단순한 순례를 넘어 녹색 순교를 실천하고자 쓰레기를 주우며 순례를 진행하고 있다. 또 무명 순교자를 위한 시와 회심 글을 낭독하거나 사향가를 부르며 해설사와 순례자가 함께하는 영성 순례를 지향하고 있다.
코끝이 시린 초겨울 저녁, 한국 교회사 연구를 대표하는 신부님과 6명의 순례자가 달빛순례에 참가한 적이 있다. 평소 존경했던 신부님 앞에서 해설을 한다는 기쁨과 설렘에 최선을 다했으나, 중간에 적지 않은 실수를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신부님은 끝까지 경청해 주시고 순례를 마친 후 수원화성을 달리 보게 되었다고 감사 인사와 함께 격려해 주셨다.
실수를 사랑의 눈으로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날의 달빛순례는 ‘경청’과 ‘겸손’의 덕목을 배우며 많은 것을 느낀 시간이었다.
따뜻한 생명력이 피어나는 4월에는 멀리 남쪽의 수도원에서 열 다섯 분이 달빛순례에 오셨다. 순례길을 걷는 내내 침묵 속에 묵주기도를 했고 성모의 노래 <마니피캇(Magnificat)>을 부르며 거룩한 시간을 이어갔다. 기도하고 성가를 부르느라 순례 해설은 짧게 끝났지만 내 기억 속 가장 짙게 남아있는 순례 중 하나다.
순례객 중에는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중년의 수도자가 계셨다. 어린 수도자들을 순례길 내내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챙기시는 모습이 인자한 아버지 같았다. 내심 ‘이 수도원에 계신 수도자들은 참 행복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순례 다음 날 오전, 미사에 참례한 뒤 수도원으로 돌아가시면서 중년의 수도자가 감사 인사와 함께 봉헌금을 두고 가셨다. 그때 그 수도자가 수도원장인 것을 알게 됐다. 해설하는 데 부담이 될까 신분을 밝히지 않고 일반 순례자의 모습으로 여정에 함께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우리의 모습을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
침묵으로 기다려 줄 수 있으며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함께 상대의 말을 ‘경청’해 주는 것은 인간에 대한 배려이며 더 나아가 우리 사회를 지탱하게 해 주는 힘이다.
글 _ 이창원 바오로(수원화성순교성지 순례해설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