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를 피하기에는 지리적 여건이 좋지 않음에도 전북 완주군 소양 지역에 신리골, 성지동, 발문이 등 독실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이유는 ‘시기’ 때문이었다는 의견이 제시됐다.
전주가톨릭순교현양원(원장 김광태 야고보 신부)은 9월 23일 소양면 행정복지센터에서 완주 지역 천주교 신앙공동체 연구 2차 심포지엄 ‘소양 교우촌 연구’를 개최했다.
전주교구 호남교회사연구소 서종태(스테파노) 연구실장은 발제 ‘소양 지역 천주교 신앙공동체에 관한 연구’에서 “소양 지역은 지리적으로 박해 시기에 신앙생활을 하기 불리했다”며 “서쪽 일부가 개방되어 평지가 발달한 용진면과 접해 있고, 전주 관아에서 불과 20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럼에도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이유는 ‘시기’에 있다”며 “1849년 정권을 장악한 안동김씨는 천주교 탄압에 소극적이어서 박해가 많이 줄었기에 신자들은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시장이 가깝고 평지인 곳에 모였다”고 설명했다.
호남교회사연구소장 이영춘(요한 사도) 신부는 토론을 통해 소양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배경을 추가로 제안했다. 이 신부는 “흥선대원군이 러시아에 대한 대비책으로 선교사들을 통해 프랑스와 손을 잡으려 시도한 것이 희망이 돼, 소양에도 신자들이 모였을 것”이라며 “또 당시 이 지역 세력가인 오사현이 순교자들을 도왔고 신자까지 됐기에 천주교에 친화적인 분위기가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 연구실장은 박해 시기 이후 소양 신앙공동체의 재건에 대해서도 다뤘다. “1886년 한불조약 체결로 선교사들이 호조를 발급받아 사목 순방을 다닐 수 있게 됐다”며 “소양 지역의 공소도 깊은 산골 중심에서 평지가 발달한 지역 중심으로 재편되어 갔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