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청 근처 서호천 산책길은 세 사람 이상이 나란히 걷기엔 다소 불편하다. 가을 햇살이 따스한 날, 나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십여 분쯤 걸었을까, 앞에 여섯 살 남짓한 아이와 엄마가 송아지만 한 큰 개를 데리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나도 그들 뒤를 따라 걸었다. 재촉하지 않고 보폭을 맞추며 뒤따르는데, 아이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엄마, 우리 뒤에 사람이 오고 있어.”
순간 나는 미소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사람이구나. 사람이었구나.” 단순한 말이었지만 가슴을 찌르는 울림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진정 사람답게 살아왔는가? 주님의 자녀답게, 주님의 사람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질문들이 물밀듯 가슴을 두드렸다.
우리는 누구를 비난할 때 “사람도 아니다, 짐승만도 못하다”라는 말을 하거나 듣는다. “이 사람아, 정신 좀 차려”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람’이라는 이름은 존엄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무거운 책임을 내포한다. ‘사람’이라는 단어 안에 있는 ‘람’자의 받침 ‘ㅁ’은 네모꼴이다. 둥글지 못한 모서리처럼, 인간의 불완전함을 드러내는 것 같다. 성현들은 말한다. 사람은 누구나 모자라고 부족한 존재이기에 그 모난 부분을 갈고 닦아 원만한 모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완전한 인격을 갖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인생길을 걸으며 다듬어야 한다. 모가 난 채로는 쉽게 부딪히고 갈등을 낳는다. 그래서 사람은 평생 그 ‘ㅁ’을 둥글게 갈아내야 한다. 그것은 곧 사랑을 배우는 일이다. 성경은 사랑 안에서 사람이 완성을 향해 간다고 가르친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신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르 12,30-31 참조)고 명하셨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은 참고 기다리며, 친절하고, 교만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믿고 바라며 견디어 낸다”(1코린 13,4 이하)고 가르친다. 결국 사람은 사랑할 때만 참된 ‘사람’이 된다.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저 껍데기일 뿐이다.
하지만 사랑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당장 오늘 이 자리에서 실천해야 할 구체적 덕목이다. 산책길에서 모녀가 내게 길을 내어준 작은 배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시작이다. 누군가를 향한 미소, 따뜻한 말 한마디, 곁을 내주는 여유 등 이 모든 것이 사랑의 구체적인 얼굴이다. 아이가 했던 “사람이 오고 있어”라는 말은, 어쩌면 주님께서 내 귀에 속삭이신 부르심이었을지 모른다.
“너는 사랑할 때 참 사람이 된다. 그러니 사람답게, 사랑으로 살아가라.”
사람은 하느님과 부모님의 사랑으로 빚어진 존재이며, 사랑으로 완성되는 존재다. 오늘도 나는 여전히 부족한 나 자신의 ‘ㅁ’을 조금씩 갈아내며, 사랑 안에서 참된 사람이 되기를 배운다. 그리고 그 길에서, 주님께서 내 이름을 사람이라 불러 주시기를 소망한다.

글 _ 이용훈 마티아 주교(수원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