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종 어린 시절의 풍경을 떠올리곤 한다. 우리나라가 아직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1인당 국민소득이 78달러였던 시절이었다. 논밭일이 멈추는 농한기, 시골 마을은 깊은 침묵 속에 잠긴 듯 보였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남정네들은 마을 사랑방에 모여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짜며 한겨울을 견뎠다. 여인들은 구석구석 바느질하며 아이들을 돌봤다. 연기 자욱한 아궁이 앞에 옹기종기 모여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떠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눈에 선하다.
그 속에서 내 눈에 유난히 또렷하게 남아 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젖을 갓 뗀 아이에게 할머니가 밥을 한 숟가락 당신 입으로 씹은 뒤 작은 숟가락에 얹어 아이의 입에 넣어주던 모습이다. 요즘 세상에서는 “큰일 난다”는 아이 엄마 비명이 나올 것이다. 위생을 중시하는 요즘 눈으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당시엔 누구도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그것이 아이를 살리는 방법이고 전통적 어르신들의 지혜이었을까.
세월이 흘러 나 역시 노년으로 접어들었다. 거울 속에 나는 청년과 중년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나이 듦이 서글픈 일은 아니다. 살아온 세월의 아름다운 추억도 적잖이 쌓여있을 것이다. 할머니가 밥을 씹어 먹여 주던 그 장면은 비록 위생적으로는 부적절했지만, 생명을 살리려는 본능적인 희생의 표현이었는지 모른다.
칫솔은 참 작은 도구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크게 바꾸었는지 떠올리면 놀랍다. 예전에는 소금을 곱게 빻아 손가락에 그 가루를 묻혀 이를 닦았다. 치아는 늘 약했고, 중년을 넘기기도 전에 이를 거의 잃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음식 섭취가 제한되고 건강은 빠르게 쇠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칫솔과 치약, 치과 의학의 발달은 삶의 질을 획기적으로 바꾸었고, 수명 연장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것에 많은 이가 동의할 것이다.
나는 이 단순한 사실 앞에서 생각에 잠기게 된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지혜와 탐구심은 작은 도구를 통해서도 생명을 살리고 수명을 연장하는 길을 열어 주셨다. 인간의 손에 들린 칫솔은 단순한 위생 도구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은총의 통로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칫솔을 들며 이렇게 고백한다. “주님, 오늘 하루도 저를 지켜주시고 제 몸을 잘 돌보고 선행에 한 걸음 나아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오래 산다는 것이 곧 잘 살고 있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평균 수명이 늘었다는 것은 사회의 발전을 보여주는 지표이지만, 성경은 단순히 햇수를 늘리는 데 인생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창세기의 기록은 아브라함에 대해 “그는 한껏 살다가 조상 곁으로 갔다”(창세 25,8 참조)고 전한다. 여기서 말하는 ‘한껏 산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 살았다는 뜻을 넘어, 충만하게, 의미 있게, 하느님께서 맡기신 삶을 온전히 살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글 _ 이용훈 마티아 주교(수원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