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어느 추운 겨울날, 방한모를 깊이 눌러쓰고 길을 걸어가던 중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머리와 이목구비가 거의 가려져 눈과 뺨만 조금 보이는 내 모습을 본 한 할머니가 “어쩜 그렇게 곱고 예쁘세요?”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순간 놀라 얼떨결에 “제가 그런가요?”라고 대답을 하자, 내 목소리를 듣고서야 “어머, 남자분이시네요”라며 당황하고 미안해하셨다. 그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은 내 마음을 전혀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생 들어보지 못한 칭찬을 들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잠시 웃음을 머금고 길을 걸으며 나는 생각했다.
‘칭찬하면 고래도 춤을 춘다고 하던가.’
‘곱다, 예쁘다, 좋다, 훌륭하다’하는 말들은 단순히 상대방의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이 아니라, 상대를 바라보는 마음의 시선에서 나온다. 시력이 약해진 할머니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내가 우아한 여성으로 보였을지라도, 그분 마음 안에는 누군가를 긍정적으로 보려는 순수성이 들어 있었다. 나는 과연 내 이웃을 바라보며 이런 눈길을 보내고 있는가. 혹여 남을 험담하거나 비난하면서 나 자신을 높이려 하지는 않았는가. 다른 이의 허물에는 민감하면서, 나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관대하지는 않는가. 방한모 속의 가려진 내 모습은 누군가에게 편견으로 판단하는 빌미가 될 수도 있는 것인가.
성경은 우리에게 지혜로운 눈길을 가지라 가르친다. “백발노인으로서 판단력이 있고 원로들로서 건전한 의견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노인들의 지혜와 존경받는 사람들의 지성과 의견은 얼마나 좋은가!”(집회 25,4-5)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 세월의 무게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지혜와 삶의 깊이를 발견하는 눈을 가지라는 말씀이다.
사실 우리 주변의 모든 이가 하느님의 걸작품이요, 은총의 그릇이다. 그러나 내가 그분들의 장점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 좋은 개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칭찬은 단순한 미사여구가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지으신 존재의 선함을 인정하는 작은 신앙 고백이다. 누군가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순간, 나는 그 사람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손길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입술은 불평이나 비난이 아니라, 감사와 칭찬과 축복의 말로 채워져야 하지 않을까.
나는 다짐한다. 남은 생애 동안, 이웃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을 먼저 보고 싶다. 가려진 부분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고 싶다. 그리고 그분께서 나를 바라보시듯, 긍정과 자비의 시선으로 다른 이들을 대하고 싶다. 작은 칭찬 한마디가 사람의 하루를 밝혀주듯, 나의 말과 눈길도 누군가의 삶을 세워주는 도구가 되기를 소망한다.

글 _ 이용훈 마티아 주교(수원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