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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에세이] 무계획 성지순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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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본당 설립 25주년을 맞아 25곳 성지순례를 다녀오시면...”


본당 공지사항 시간, 신부님의 한 단어가 뇌리에 박혔습니다. 어디를 갈지, 무엇을 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여행에서 성지순례라는 큰 주제가 단 3초 만에 확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세부적인 계획까지도 단 10초 만에 종결되는 기적을 저는 경험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침낭을 매고, 지나가는 성지 아무 데나, 지나가는 찜질방이든 길바닥이든 아무 곳에서나 자기. 이것이 제 여행 계획의 전부였습니다. 제일 성지순례다운 계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흥분에 가득 차 성당 청년회 회식 때 여행 계획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속으로 내심 ‘나의 여행 계획이 너무 낭만적인 나머지 너무 많은 사람이 동참하겠다 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제 여행 계획은 철저히 무시당했습니다. “그러다 객사하는 거다”, “왜 거지 생활을 돈 써가면서 하냐?”,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냐?” 등 원색적인 비난들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손가락질도 제 이상을 막을 순 없었습니다. 제 심장 소리는 그들의 비난보다 컸으며, 눈은 희망으로 빛났습니다.


그래도 그들의 비난이 근거가 전혀 없는 말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저는 객사하지 않기 위해 조금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여행 기간은 더 길어질 수도 있지만, 일단 한 달 정도로 잡았습니다. 예산은 편의점에서 하루 두 끼, 찜질방에서의 숙박을 고려하여 60만 원으로 정했습니다. 사실 계획에 따른 예산이 아닌 통장에 있는 돈이 60만 원이었기에 후발적으로 정해진 예산 계획이었습니다.


이 외에는 그 어떤 계획도 없었기 때문에 여행 준비에는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가져온 자전거에 짐받이를 달고 짐받이에 침낭과 옷가지를 묶어두는 게 여행에 가는 데 필요한 모든 준비였습니다. 준비보다는 마음을 바로잡는 데 더 집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평소에 하지 않았던 집 청소를 했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감사하며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여행 당일인 월요일 새벽 미사에는 평소보다 일찍 성당을 찾아 여행을 잘 끝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 본당 신부님께 인사를 드리고 축복을 기원하는 안수를 받으며 제 성지순례는 시작되었습니다. 가슴 벅찬 기쁨으로 페달을 밟았고, 쌀쌀하지만 약간 습기를 머금은 새벽 공기는 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글 _ 조각희 프란치스코(수원교구 가톨릭 대학생 연합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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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5-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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