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나는 어린 시절에는 소심하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공소 회장이셨던 아버지와 7명의 형제자매 사이에서 지내면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마음속의 이야기를 하지 못한 채 성장했다.
어린 시절에 대한 한 가지 기억이 있다. 친구들과 밖에서 놀고 있을 때 기도할 시간이라고 부르던 부모님의 목소리다. 어린 마음에 기도하지 않고 놀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미술을 하고 싶다는 말을 부모님께 말씀드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학창 시절, 나무에 조각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나무를 깎아내는 일은 복이 붙지 않는 일”이라며 다른 일을 할 것을 권했다. 그때 미술을 포기했다면 나는 성미술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꿈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결과 미대에 진학할 수 있었다. 대학에서 흙과 염색, 직조 등을 접하면서 새로운 흥미를 갖게 되었다.
나의 손길을 통하여 무언가가 창조된다는 기쁨은 미술 작업에 몰입하는 원동력이 됐다. 대학미술대전에서 한국적인 이미지를 담아낸 내 작품이 큰 상을 받기도 했다. 그 이후로 나만의 작품 세계가 구축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학 졸업 후 의류회사 디자인실에서 텍스타일 디자인을 하며 세계로 수출하는 옷감에 무늬를 그려내는 작업을 했다. 8명의 디자이너와 아이디어를 나누며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훗날 미술 작가로 성장하는 기반이 됐다.
내 삶의 또 다른 한 축은 신앙이다. 미술 작가로 성장하는 데 신앙도 큰 역할을 했다.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본당에서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시작했다. 활동을 하면서 비신자를 입교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내향적인 성격인 탓에 이웃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9일 기도를 시작했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덕을 구하며”라는 구절이 나를 변화시켰다.
그 무렵에 교구에서 성경공부 봉사자 교육이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기도에 대한 답을 찾았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봉사를 시작했고 그 여정은 7년간 이어졌다. 사람들에게 신앙에 대한 말을 꺼내기 어려웠던 내가 여러 사람 앞에서 말씀을 전달하기에 이른 것이다. 강의하기 위하여 매일 성경과 강의 노트가 집안에 펼쳐져 있었다. 강의를 준비하는 일은 일상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성경 말씀을 어떻게 신자들에게 잘 전달할지를 고민했고 더 나아가 말씀을 흙으로 어떻게 표현해 관람객들에게 기쁨을 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느님의 말씀은 내 미술 작업의 중요한 정체성이 됐다. 그렇게 흙을 빚어 성물을 제작하는 미술 작가 최계진이 됐다.

글 _ 최계진 마리아(수원가톨릭미술가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