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의 역사는 단순히 연대표나 사건의 기록이 아니다. 교구사라는 이름의 그 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는 하느님이 교구 안에 함께하시고, 또 그 부르심에 응답해 온 공동체의 신앙이 담겼다. 교구의 발자취와 그 안에 담긴 신앙의 역사를 ‘교구사 한 페이지’에 한 장, 한 장 담아 본다.
「최고 목자」 반포, 교구 설정되다
“나의 어깨에 지워진 온 성교회의 ‘최고 목자’로서의 직분은, 때를 따라서 교구들의 지역을 더욱 적절히 배정해 새로운 교회구역을 정하는 것을 요구한다. … 이를 ‘수원교구’라 명명하고 또 이 교구를 한국 본방인 성직자들에게 위탁한다.”
성 바오로 6세 교황은 1963년 10월 7일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에 칙서 「최고 목자」를 반포했다. 교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칙서가 ‘한국 본방인 성직자들’을 명시하듯, 교구 설정은 설립 초기부터 한국인 성직자에게 맡겨진 교구라는 점에서 주목받는 사건이었다. 교황은 칙서와 함께 당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총무를 맡고 있던 윤공희(빅토리노) 신부(현 대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물론 앞서 전주·부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이 한국인 성직자로 임명되기는 했지만, 각각 지목구·대목구에서 교구로 승격된 것이었다. 또 서울교구에서 분리된 교구 중 한국인 주교가 초대교구장인 교구는 수원교구가 처음이었다.
조선교구는 1911년 대구교구 설정에 따라 서울교구로 개칭한 이후로도 교세 확장에 따라 많은 교구를 분리해 왔다. 원산교구를 시작으로 평양교구, 춘천교구가 설정됐고, 6·25전쟁 휴전 이후로도 청주·대전·인천교구가 설정됐다. 아직 한국인 성직자가 부족했던 당시 서울교구에서 분리된 교구들은 메리놀 외방 전교회,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파리외방전교회 등 외국 선교회들이 맡아왔다.
교황은 칙서를 통해 수원교구를 “서울교구에서 경기도 내에 있는 수원시와 부천군, 시흥군, 화성군, 평택군, 광주군, 용인군, 안성군, 이천군, 양평군, 여주군을 포함한 지역”으로 설정했다. 이 교구 관할 지역에 본당은 모두 24개, 공소는 200여 개였다.
당시 교구 신자 수는 4만2548명으로, 인구 대비 신자 비율이 3.2에 달했다. 당시 전국 신자 비율이 2 안팎이었음을 생각하면 상당히 높은 비율이었다. 신앙 선조로부터 이어오는 유서 깊은 교우촌 지역에 기반을 둔 본당이 많은 덕분이었다. 물론 그 대부분이 농촌 지역이었고, 신자 대다수가 농민이었기 때문에 도시에 비해 물질적인 여력은 부족했지만, 신앙 열정만큼은 그 어느 곳보다 뜨거운 교구였다.
교황은 칙서에서 “이 교구의 주교는 자기 주교좌를 수원시에 두고, 또 그 주교좌를 같은 곳에 있는 성 요셉 성당에 두기를 나는 원하며, 따라서 이 성당을 합당한 모든 권리와 특전을 가진 주교좌성당으로 승격시킨다”고 밝혔다. 성 요셉 성당이란 ‘노동자의 모범이신 성 요셉’을 주보로 하는 고등동성당을 일컫는 말이다.
윤 대주교는 같은 해 10월 20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에게 주교 서품을 받았다. 이어 12월 21일에는 고등동성당에서 교구장 착좌식이 거행됐다.
시노달리타스와 함께 시작하다
“모든 평신도는 대중 속으로 옮기는데 용감해야 한다.”
1963년 12월 25일자 「가톨릭신문」은 윤 대주교의 착좌식을 보도하며 윤 대주교의 언급을 보도하고 있다. 윤 대주교는 무엇보다 ‘평신도’의 역할을 강조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사목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시노달리타스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50여 년 전부터 윤 대주교는 교구에 시노달리타스를 구현하고자 애썼던 것이다.
공의회, 곧 시노드의 정신을 담은 시노달리타스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라고 하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론적 성찰을 담고 있다. 교회가 교계제도, 즉 주교, 신부로 이어지는 성직자들과 제도로서 구성된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 바로 하느님 백성들이 곧 교회라는 것이다. 이 교회론이야말로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구성원들이 각자 동등한 품위와 활동 안에서 서로 경청하며 성령이 이끄는 길을 찾아가는 시노달리타스의 근간이다.
윤 대주교가 로마에서 주교품을 받을 당시, 보편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제1·2차 회기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중 2차 회기가 바로 후에 교회헌장이 선포한 ‘하느님 백성’에 관한 논의가 뜨겁게 진행되던 회기였다. 윤 대주교는 주교 서품 직후 대의원으로서 공의회 제1·2차 회기에 참석했다. 주교가 된 후 가장 먼저 시노달리타스의 정신이 형성되던 그 현장에 자리했던 것이다. 교구의 시작은 시노달리타스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 대주교는 교구 설정과 함께 서한 「수원교구 설정에 즈음하여」를 발표하면서 ‘신앙생활과 전교활동 강화’라는 교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구장 주교, 본당 신부, 평신도가 하나로 화합해야 하며 ▲성직자들은 신자들이 본당에서 신앙생활을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신자들은 평신도 사도직의 사명감을 가지고 교회 밖으로 나가 적극적으로 전교 활동을 해야 함을 천명했다. 성직자가 이끄는 교회가 아닌 각자의 자리에서 복음화를 위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모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