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0월 5일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이었던 김남수(안젤로) 신부가 수원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이후로 1984년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이하기까지 10년간 교구에는 또 다른 장이 펼쳐진다. 초대 교구장이었던 윤공희(빅토리노) 대주교가 다져 놓은 기반 위에서 교구는 더욱 성장해 나갔다. 특히 전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으며, 정부의 산아 제한 정책에 맞서 생명 운동에 힘썼다.
제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 착좌
김남수 주교의 착좌식은 1974년 11월 21일 당시 주교좌였던 고등동주교좌성당에서 윤공희 대주교 주례로 거행됐다. 김 주교가 교구장에 부임할 당시인 1974년 12월 교구 내 본당은 31개, 공소 339개, 신자 6만 7736명, 성직자 62명, 대신학생 48명, 소신학생 27명이었다.
김 주교는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UT SINT UNUM)’를 사목 표어로 내걸었다. 즉, 교구장을 중심으로 온 교구민이 하나로 뭉쳐서 현대사회의 분열, 종교에 대한 불신과 황금만능주의 풍토를 극복해 나갈 것을 밝힌 것이다.
이는 1975년 ‘화해의 희년’에 발표한 연두 교서에도 반영됐다. 김 주교는 연두 교서에서 “특히 주교와 사제들, 사제와 사제, 사제와 교우들, 교우와 교우 사이에 참된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며 “교회적 일치야말로 그리스도의 최후의 소망이었으며, 일치야말로 교회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김 주교는 교구의 여러 부분을 챙기며 발전을 이끌었다. 첫째, 훗날 수원가톨릭대학의 설립으로 이어지는 사제 성소 발굴과 양성에 열의를 가지고 임했다. 둘째, 전 세계교회의 흐름과도 같이, 청소년에 관심을 두고 효과적 교육 방법 모색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셋째,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과 시성을 위한 순교자 공경 열정을 되살렸다. 이러한 순교자 연구와 현양, 성지 개발은 교구 차원으로 발전됐다.
넷째, 교세 확장 속 교구의 구심점인 주교좌성당, 교구청 정비가 이루어졌다. 1977년 5월 18일 조원동주교좌성당 준공식과 함께 교구 공식 주보로 ‘평화의 모후’가 선정됐다. 아울러 교구와 지구 조직 체계가 자리를 잡게 됐다. 1977년 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재결성됐으며, 1978년 교구 사제평의회가 구성됐다.
한국교회 200주년, 전교하며 준비
1979년 ‘전교의 해’를 맞아 김 주교는 사목 지침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교구 신자들에게 자신의 구원뿐 아니라 타인의 구원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전 생애를 전교 활동에 바칠 것을 권고했다. 이를 위해서 기도와 영성 생활을 강조하며, 가정과 본당에서 기도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또한 신자 재교육, 사제와 수도 성소 육성, 청소년 배려, 성당 건축을 위한 경제적 협력, 성지 개발 협조 등을 요청했다.
또 1981년 ‘이웃 전교의 해’에는 각 본당에서 다각적인 전교 활동을 독려해 교세 확장에 크게 힘썼다. 그 결과, 1982년에는 전년 대비 신자 수가 1만2000명 증가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교구 설정 20주년이었던 1983년 5월 8일, ‘교구 20주년 기념 선교대회’를 수원 공설운동장에서 거행했다. 참석자 약 3만5000명은 ‘이 땅에 빛을’이라는 주제 아래 ‘모두 모이자! 기도하자! 선교하자!’를 구호로 외쳤다.
또한 사목 지침을 통해 한국교회 200주년을 위한 기념 회의와 정신 운동, 기념행사, 기념사업과 신앙 행사들의 추진을 제시했다. 우선 기념 회의로 교구 사목 회의를 개최했다. ‘200주년 사제, 수도자 및 평신도 합동 연수회’와 교구 산하 단체·수도회·지구·본당별 사목 회의가 열렸으며 최종 정리 회의로 마무리됐다.
교구는 ‘한국천주교회 선교 200주년 기도문’과 ‘200주년 어린이 노래’를 보급해 쇄신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정신 운동을 펼쳤다. 또 2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순교자 유해의 본당 순회 기도회를 열고 본당과 기관에 유해 분배도 이어갔다. 중점사업도 마련했는데, ▲대신학교 건립 ▲미리내성지 개발 ▲천진암성지 개발 ▲교구 20년사 편찬을 결정하고 추진했다. 이러한 준비 속에 교구는 1984년 한국교회 200주년을 맞이한다.
생명 수호와 가정 성화 펼쳐
1960~1970년대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정부는 산아 제한 정책을 펼쳤다. 피임 도구 보급, 불임수술 시행, 인공 유산(낙태) 허용 등을 추진해 교회와 갈등을 빚었다. 교회는 낙태 허용과 불임수술을 명시한 모자보건법에 대항하여 1973년 행복한 가정 연구위원회를 발족했다. 또한 낙태와 비 그리스도적 피임법에 반대하며 대신 자연주기법을 홍보했다.
특히 김 주교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으로 있던 시기부터 정부의 경제성장 위주 보건정책 비판에 앞장섰다. 김 주교는 교회의 미래가 산아 장려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인구 증가와 성소 계발을 연결시키며 적극적으로 생명 수호 운동을 벌여 나갔다.
이에 교구는 1976년 ‘경제 발전을 위해 생명권이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김 주교의 뜻에 따라 행복한 가정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성빈센트병원과 교구청 강의실에서 지도자 교육을 실시했으며, 유급 가족계획 지도원을 채용해 본당 출장 교육을 전개하도록 했다. 각 본당 대표 여성 교육과 성직자·수도자들 대상 세미나 등을 마련했다.
1980년 ‘가정 성화의 해’에는 교구장 사목 교서를 통해 가정과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혼인 준비 교육과 산아조절에 대한 교육을 강조했으며, 그 이후로도 이를 실행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