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는 설정 초기부터 순교자 현양에 역점을 둬왔다. 미리내성지를 중심으로 전개된 순교자 현양과 성지 개발은 제2대 교구장 김남수(안젤로) 주교 재임 시기 더욱 활기를 띤다. 현재 교구 성지 14곳 중 절반이 넘는 8곳이 김 주교 재임 시기 개발이 시작된 곳이다. 이 시기 교구 내에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시복시성 운동과 성지 개발의 모습은 어땠을까.
시복시성 운동 - 창립 선조에 관심을 기울이다
김남수 주교는 주교 임명 전부터 꾸준히 순교자 시복시성 추진에 큰 관심을 기울여왔다. 김 주교는 주교회의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던 1968년 10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 시복식에 한국 신자를 파견하는 실무를 맡았다. 1971년부터는 103위 한국 순교복자 시성 추진 건을 주교회의에 상정하는 일에 앞장섰고, 이런 활동이 주교 서품 이후에도 이어졌다.
이어 김 주교가 1974년 수원교구장으로 취임한 이후, 1975년 주교회의 추계 총회에서는 ‘시성을 위한 기도문’이 인준됐다. 1976년 춘계 총회에서는 김 주교가 정식으로 103위 복자 시성 건을 발의해 시성 추진 담당을 맡게 됐다.
무엇보다 김 주교가 크게 관심을 가진 것은 하느님의 종 이벽(요한 세례자)을 비롯한 한국교회를 세우는데 앞장선 창립선조들의 시복시성이었다. 김 주교는 주교회의에서 시성 추진 담당을 맡을 당시부터 한국교회 창립 선조부터 1801년 신유박해까지의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운동을 103위 복자의 시성운동과 함께 전개하자고 제안했다.
김 주교는 1980년 「가톨릭수원」에 ‘이벽 시복시성 운동에 즈음하여’를 발표해 교구민의 참여를 독려했다. 김 주교는 ▲신약성경 통독하기 ▲적어도 한 사람 입교시키기 ▲각자 본당에 성심껏 헌금하기 ▲‘이벽 성조 시성 운동 기도문’ 9일간 바치기 등을 구체적인 실천 사항으로 제시했다.
교황청에서 103위 복자의 시성이 확정되자 김 주교는 다음 추진 사업이 창립 선조 시복시성임을 강조했고, 1984년 ‘한국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인 광암 이벽과 그 동료 순교자 및 증거자들의 시복 추진 심사’의 착수를 선포했다. 그러나 20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가 해산되면서 시복 추진 업무는 전례위원회로 넘어갔고, 1985년에는 주교회의에서 시복 추진을 교구별로 분리 추진하기로 하면서 수원교구는 ‘창설 주역 5위 시복’에 나서게 됐다. 그러나 이마저도 1988년 103위 성인 신심 위축을 이유로 보류됐다.
그럼에도 교구는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 추진 의지를 꺾지 않았다. 교구는 1996년 ‘윤유일(바오로)과 7위 순교자’의 시복 추진을 시작해, 그해 11월 교황청에서 시복 추진 허가 공문을 받았다. 교구의 이런 노력이 2014년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복자’의 탄생으로, 또 ‘하느님의 종 이벽 세례자 요한과 동료 132위’의 시복시성 추진으로 이어졌다.
성지 개발에 나서다
창립 선조에 대한 시복시성 운동의 열기는 성지 개발로도 이어졌다. 대표적인 곳이 천진암성지다. 교구는 ‘한국천주교 발상지’로 천진암 터를 주목하고 1978년 대지를 매입했다. 이어 1979년에 발견된 이벽의 묘에서 이벽의 유해를 이장하면서 성지 개발이 본격화됐다.
교구는 1981년 6월 24일 ‘한국천주교회창립기념일’ 제1회 경축 기념행사를 천진암성지에서 개최했다. 김남수 주교를 비롯해 서울대교구장 노기남(바오로) 대주교, 루치아노 안젤로니 주한 교황대사 등이 참석한 성대한 행사였다. 그해 11월에는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하느님의 종 이승훈(베드로)·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묘를 천진암으로 이장했다.
천진암성지뿐만이 아니었다. 구산·남한산성·어농·단내·남양성모·죽산·수원성지도 김 주교가 재임하던 시기 개발된 성지다.
김성우(안토니오) 성인의 묘역인 구산성지는 1980년 성지로 선포됐다. 성인의 후손들과 신장본당이 1977년 성인의 묘 옆에 ‘김성우 안당 순교현양비’를 건립하면서 성지 개발과 본당 승격운동이 시작됐고, 1979년 구산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성지 개발이 빠르게 진척될 수 있었다.
남한산성 순교성지는 1978년 남한산성 내 대지를 매입하면서 개발이 시작됐지만, 남한산성이 도립공원인 관계로 개발 제한이 많아 성지 조성에 많은 난관을 겪었다. 그러나 신장본당과 서부본당의 노력으로 성역화 작업에 매진했고, 마침내 1998년 순교성지로 선포될 수 있었다.
어농성지와 단내성지는 본래 ‘이천성지’로 함께 개발된 성지다. 1987년 복자 윤유일(바오로)의 후손을 통해 어농리에 있는 선산에 복자 윤유오(야고보)의 묘가 있다는 것이 확인돼 그해 9월 성지로 선포됐다. 이때 정은(바오로) 순교자가 살던 교우촌 터이자 묘소도 함께 성지로 축복됐다. 이천성지는 2003년에 어농성지와 단내성지로 분리됐다.
병인박해 순교지인 남양·죽산·수원성지 개발도 진행됐다. 남양은 남양본당을 중심으로 1983년 ‘남양 치명성지 개발위원회’가 구성돼 성지 개발에 들어갔다. 본당은 순교자들이 성모님께 의탁했던 점을 기억하면서 순교자 현양과 성모신심을 위한 성지로 개발하고자 했고, 이전부터 성모순례지를 조성하고자 했던 김 주교는 이 뜻을 받아들였다. 교구는 1991년 남양 순교지를 성모성지로 선포했다.
죽산성지는 1979년 말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다. 안성본당은 1980년 죽산리의 대지를 매입해 죽산성당을 완공했으나 순교지와 떨어져 있어 대지를 다시 매입해 개발을 시작했고 1995년 성지로 선포될 수 있었다. 또 북수동본당이 1995년부터 순교지에 관한 자료 연구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병인박해 순교지임에도 잊혀져 있던 수원성지 개발도 시작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