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의 책장을 넘기다 보면, 교황과 주교, 공의회와 신학자의 이름으로 채워진 서술 구조 속에서 여성의 이름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미국 교회사 전문 매체 ‘크리스찬 히스토리’가 지적했듯, 초기교회에서 여성은 십자가 아래 마지막 제자였고, 빈 무덤의 증인이었으며, 초대교회의 중요한 일꾼이었지만 그 역사는 소홀히 다뤄졌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공식 기록 안에서 잘 눈에 띄지 않았지만 공동체와 사상, 신앙 실천의 영역에서 깊은 발자국을 남긴 세 명의 여성을 다시 만나 본다.
■ 성녀 마크리나(Macrina the Younger, 327~379) - 교부 시대 이해에 필수적 인물
4세기 카파도키아의 성녀 마크리나는 흔히 대 바실리오와 니사의 그레고리오의 누이로 소개된다. 그러나 니사의 그레고리오가 남긴 「마크리나의 생애」와 「영혼과 부활에 대하여」를 따라가 보면, 단순한 ‘교부의 자매’가 아니라 형제들의 신앙과 사유에 중요한 기준점을 제공한 인물로 드러난다.
약혼자의 죽음 이후 독신을 선택한 마크리나는 가족 재산을 나누고 노예들을 해방시킨 뒤, 폰투스 이리스 강변에 여성 금욕 공동체를 세웠다. 그가 이끈 공동체에서 해방된 여성 노예들은 하녀가 아니라 함께 기도하고 일하는 자매였다. 노예와 주인이 한 공동체 안에서 재산을 공유하며 생활한 이 실천은 당시의 신분 질서를 고려할 때, 초기 그리스도교가 금욕과 공동생활을 어떻게 결합해 갔는지를 보여주는 예로 거론된다.
이 공동체에서는 묵상과 기도, 찬송이 노동과 긴밀히 얽혀 있었으며, 마크리나 자신도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눈 뒤 손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신앙이 경제적 선택과 사회적 책임으로 이어진 삶이었다.
세속적 명성을 좇던 대 바실리오가 금욕과 공동체 삶으로 방향을 전환한 배경에는 마크리나의 권고와 모범이 있었다. 니사의 그레고리오는 임종을 앞둔 누이를 ‘스승(ho didaskalos)’이라 부르며, 영혼의 불멸과 부활을 논한 밤샘 대화를 「영혼과 부활에 대하여」에 남겼다. 초기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여성이 신학적 사유의 주체로 등장하는 드문 문헌으로 평가된다.
그의 삶은 수도 전통의 형성과 교부 신학의 배경에 깊이 관여했다. 주요 기록에 이름을 크게 남기지 않았어도 ‘교부 시대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기억되는 이유다.
■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 of Bingen, 1098~1179) - 교회 학자로 선포된 네 번째 여성
12세기 독일의 베네딕도회 수녀원장 빙엔의 힐데가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체험한 환시를 바탕으로 창조와 구원, 교회와 역사, 인간과 세계에 관한 독창적인 신학적 상징 언어를 펼쳐 보였다. 신학 저술에 그치지 않고 성가와 음악을 작곡하고 자연과 의학에 관한 저작을 집필했으며, 수도원 담장 너머 교회 현실과 직접 소통했다.
교황과 황제, 주교와 평신도들에게 수백 통의 편지를 보내 성직자들의 부패를 비판하고 회개와 개혁을 촉구했으며, 라인강과 마인강 일대를 순회하며 설교했다. 중세교회에서 여성이 공적으로 설교하고 교계 지도자들을 향해 발언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언어는 완곡하지 않았다. 당대 성직자들을 향해 “눈먼 이들이 눈먼 이들을 이끈다”고 직격했고, 교황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거침없이 교회의 나태와 부패를 질타했다.
힐데가르트는 자연과 인간, 몸과 영혼, 예술과 전례를 분리하지 않는 통합적 영성을 제시했다. ‘푸르름(viriditas)’이라는 개념으로 모든 피조물 안에 스며 있는 하느님의 생명력과 치유를 말하며, 자연과 몸, 음악과 식생활을 모두 창조와 구원에 참여하는 자리로 이해했다. 이 시선은 오늘날 생태 영성과 전일적 치유 담론에서도 그의 이름이 다시 거론되는 배경이기도 하다.
2012년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힐데가르트를 보편교회의 성인으로 선언하고 교회 학자로 선포했다. 시에나의 가타리나, 아빌라의 데레사, 리지외의 데레사에 이어 네 번째 여성 교회 학자다. 중세의 가부장적 구조 속에서도 영적 권위와 카리스마를 지닌 여성 수도자가 신학적 권위를 갖고 활동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다. 그의 이름은 이제 교회가 스스로 인정한 신학사의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 가경자 마들렌 들브렐(Madeleine Delbr?l, 1904~1964) - 일상 속 신앙 실천한 평신도 사회복지사
20세기 프랑스의 평신도 마들렌 들브렐은 공산주의 체제 한복판에서 복음을 살았던 가톨릭 신비가이자 사회복지사다. 거리의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을 소명으로 받아들이며, 평신도 사도직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을 무신론자로 규정하며, 지적·예술적 분위기의 파리 청년 문화 안에서 살았다. 그러나 20대 초, 깊은 내적 공허와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 속에서 기도와 복음, 전례를 통해 하느님을 ‘살아 있는 사랑’으로 체험했다. 이 회심은 그의 삶 전체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신앙을 얻은 뒤 향한 자리는, 믿지 않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도시 변두리였다.
노동자 계급과 공산주의가 강하게 뿌리내린 파리 근교 이브리(Ivry-sur-Seine)로 이주해 친구들과 함께 작은 신앙 공동체를 이루며 가난한 이들과 이웃이 되어 살았다. 시청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공산주의자들과 같은 동네에서,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일상을 나누는 방식으로 복음을 증언했다.
‘우리는 길 위의 사람들(Nous autres, gens des rues)’이라고 말했듯이, 거리가 곧 그의 생활이자 선교의 공간이었다. 저작 「우리 거리의 작은 사람들」 등은 평범한 일상의 성덕과 세속 한가운데서의 관상을 말하는 고전으로 읽힌다.
들브렐은 글과 강연을 통해 평신도 사도직과 ‘길 위의 영성’을 강조하며, 신앙을 성당 안이 아니라 일상의 자리에서 실천할 것을 촉구했다. 세상 한가운데 선 평신도의 삶 자체가 교회의 현존이 될 수 있다는 이 확신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평신도 사도직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1964년 이브리에서 선종한 뒤, 1993년 시복시성을 위한 조사가 시작됐고, 2018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의 영웅적 덕행을 승인해 ‘가경자’로 선포했다. 그는 평신도 여성이 도시의 가장 세속적인 자리에서 교회의 얼굴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