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한일탈핵평화순례와 간담회 마지막 날인 2일 경북 칠곡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문화영성센터에서 한국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 박현동 아빠스와 일본 주교회의 생명평화인권위원회 위원 마쓰우라 고로 주교를 비롯한 양국 신자로 구성된 순례단이 탈핵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합천서 원폭 피해 생존자·후손과 만남
일본 참가자들, 성금·사죄 편지 전달
“경남 합천에서 만난 피폭자 어르신들의 눈물 섞인 증언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비극의 역사였고, 고리에서 월성으로 이어지는 핵발전소 단지는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거대한 불안의 실체였습니다.”
‘핵 없는 세상’을 꿈꾸는 한국과 일본 그리스도인들이 함께한 제12회 한일탈핵평화순례가 6월 29일~7월 2일 경북 칠곡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문화영성센터를 거점으로 열렸다. 주교회의 생태환경위원회 위원장 박현동(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장) 아빠스는 순례를 마무리하는 파견미사 강론에서 3박 4일 여정을 이같이 돌아보며 “우리가 현장에서 느낀 것은 핵과 평화가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라고 역설했다.
‘평화와 핵 - 정의로운 평화, 기억에서 배운다’를 주제로 한 올해 순례를 통해 양국 신자들은 경남 합천에서 1945년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피해 생존자와 그 후손들을 만나 대물림되는 피폭 후유증의 현실을 마주했다. 합천은 원폭 투하 당시 한국인 피해자 70가량의 출신지로, 지금도 가장 많은 생존자와 후손이 거주해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린다. 순례단은 또 월성·새울(신고리) 등 영남권 핵발전소와 국내 첫 소형모듈원자로(SMR) 건설 부지로 선정된 부산 기장군을 찾아 지역 탈핵 활동가들과 교류하고, 주민들의 고통에 귀 기울였다.
박 아빠스는 “어떤 이들은 핵무기를 억지력이라 말하고, 핵발전은 탄소중립의 대안이라 주장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십 년간 묶인 주민들의 재산권과 씻을 수 없는 건강 피해, 다음 세대에 떠넘겨야 하는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의 고통이 자리하고 있다”며 에너지 전환은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닌 창조질서 보존을 위한 신앙적 결단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비록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좁고 험할지라도 일본과 한국의 형제자매가 국경을 넘어 연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희망의 씨앗”이라며 “세상이 말하는 ‘경제적 효율’보다 ‘생명의 가치’가 앞서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자”고 당부했다.
특히 이번 순례에서는 한일 양국의 연대를 보여주는 장면이 이어졌다. 6월 30일 일본 주교회의 생명평화인권위원회 위원장 모리야마 신조(오이타교구장) 주교와 일본 참가자들은 십시일반 모은 성금을 합천 원폭 피해자들에게 전달했다. 일제강점기와 침략 전쟁의 역사적 책임을 기억하며, 한국인들이 일본 땅에서 원폭 피해를 겪게 된 데 대한 사죄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미야시타 료코(엘리사벳, 오이타교구 남미야자키본당)씨가 편지 낭독과 함께 성금을 전달하고 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과 포옹하자, 좌중에서는 눈물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편 일본 주교회의 생명평화인권위원회 위원 마쓰우라 고로(나고야교구장) 주교는 2일 ‘핵과 평화에 대한 교회 가르침’에 관해 강연하면서 “오늘날 국제사회는 미국과 러시아 등 강대국 횡포에 무력해졌다”며 “이들의 패권 다툼으로 과거 억지력으로 여겨지던 핵무기가 이제는 실제 사용 가능성이 높은 전략 무기가 돼가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우리도 힘이 작다고 주저할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행동하고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전쟁이 다리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다리가 무너진 곳에서 전쟁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나라와 나라 사이에 공포와 불신을 뛰어넘는 신뢰라는 믿음의 다리를 만들어가자”고 당부했다.